나는 늘 산만하게 읽고 있다. 매일 집집마다 방문하는 우유배달부처럼 책에서 책으로 이동한다. 그런 식으로 매일 서너 권의 책을 짬짬이 읽는다. 한 페이지만 읽고 충분히 만족해서 다시는 읽지 않는 책도 있고, 다 읽고 나서도 주기적으로 꺼내 읽는 책이 있다.
한 페이지 속에서 낯선 생각 하나를 마주하면 그날은 어제와 구별되는 날이 된다. 신비와 마주했을 때 표정이 없어지면서 침묵 속에서 그 기쁨을 찬찬히 음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저자에 대한 애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편이다. 책을 어루만지거나 껴안으면서. 혹은 저자와 떨어지기 싫어서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잠든다.
틈 날 때마다 새로운 공간에 나를 두고 싶다. 혹은 새로운 생각 위에 나를 던져 놓고 어디까지 가는지 지켜보고 싶다. 오늘은 습기가 가득한 집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동시에 읽고 있는 책을 가지런히 배열해 보았다.
[싯다르타]는 개를 산책시키다가 잠시 쉬어가는 벤치에서 읽는다. 개는 내가 책 읽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하기 때문에 한 페이지를 다 못 읽을 때가 더 많다.
[마술사의 코끼리]는 하루의 제일 마지막에 읽는 책이다. 나는 자기 전에 침대에서 소리 내어 동화책을 읽는 습관이 있다.
[폭풍의 한가운데]는 최근에 [다키스트 아워Darkest hour]를 보고 처칠이 궁금해서 읽기 시작한 책이다.
[날씨가 만든 그날의 세계사]는 어제 저녁 교보문고에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읽고 있다가 서점 폐점시간이 되어서 데려온 책이다. 오늘은 몹시 건조했던 1966년의 런던 대화재 사건에 대해 읽었다. 그 불은 런던에 있는 가옥의 반을 다 태워버렸는데 한 빵집 주인이 오븐의 불관리를 소홀히 한 게 원인이었다고 한다.
[아날로그 사이언스]는 오늘 택배로 도착한 따끈한 신간이다. 양자물리학에 관심이 많아서 관련된 교양서적을 몇 권 사보았지만 끝까지 읽은 책은 거의 없는데 이번에는 완독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하기 어려운 책일수록 그림이 많이 있어야 한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작년에 영화 [어라이벌Arrival]을 본 날 서점으로 달려가서 읽었던 소설이다. 최근에 다시 읽고 싶어서 책꽂이에서 데려왔다.
광선은 자신의 정확한 목적지를 알아야 해. 목적지가 다르다면 가장 빠른 경로도 바뀔 테니까.
나는 이 책에 수록된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 문장을 좋아한다. 너무 좋아서 지금까지 곁에 두고 쳐다보는 문장이다. 책을 읽다가 이것이 광선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문득 알았다. 내가 만약 광선이라면 정말 가고 싶은 목적지는 어디일까?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목적지라니, 너무 멋지지 않은가. 목적지는 특정한 장소와 비슷한 의미로 들리지만 부동산이 아니라서 소유할 수 없다. 그냥 내가 도착할 지점인 것이다. 그 지점에서 누군가는 출발할 것이다.
난 늘 광선처럼 출발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미지의 세계에 도착하기 위해서, 오늘도 나를 책 속으로 배달 보낸다.
생각의 단편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