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근법은 화가가 대상을 그림으로 그릴때에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을 말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눈 앞의 대상을 재현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원근법이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공간을 지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그것에 따른 그림의 화법도 달라진다. 원근법은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느끼고 보고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
브루넬레스키의 선 원근법
우리가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르네상스의 선 원근법이다. 마사초의 <성삼위일체> 그림처럼 하나의 소실점에 의해 모든 사물들을 가지런히 배열시키는 방식. 이 원근법은 1. 보는 이의 시점을 절대로 움직이지 말 것, 그리고 2. 하나의 눈으로 볼 것. 오로지 이 규칙 안에서만 르네상스 원근법이 유효하다.
하지만 사람이 실제로 어떤 공간에서 몸과 눈을 삼각대처럼 고정시키고 오로지 한 쪽 눈을 사용해서 세상을 지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계속 움직이기도 하면서, 또 두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다른 원근법을 살펴보자.
러시아의 역원근법
러시아인들은 르네상스인들보다 시선을 좀 더 움직인다. 사물의 양 옆, 위 아래를 관찰한 다음에 가운대로 공간을 모으는 방식. 르네상스의 기하학 못지않게 여기에서도 수학적인 규칙들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이 방식이 사람의 일상적 지각을 재현하는 방법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다.
사물의 양 옆 측면을 가운데 공간으로 모으다 보니 르네상스 원근법과는 다르게 앞쪽이 좁게, 뒷쪽이 넓게 묘사된다. 이것은 마치 동양의 책거리 민화 그림을 연상케 한다.
조선시대 책거리 민화
이 그림을 보면 가까운 쪽은 좁게, 먼 쪽은 넓게 원근을 그리는 방식, 러시아의 역원근법과 겉보기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속의 세계관은 다르다. 러시아인들이 양 측면의 공간을 가운데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역원근의 형식이 생겨났다면, 동양화의 책거리민화는 사람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관점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앞쪽이 좁게 묘사된 것이다.
서양인들의 원근법이 나는 '본다'라는 적극적 의미의 인간 중심의 시각이라면 동양인들에게 사물은 내게 '보인다' 라는 대상 중심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원근법과 내용과 형식 모두에 있어서 정반대 라고 볼수 있다. 내가 사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사물을 위한 그림. 사물이 나를 보는 것.
곽희의 삼원법과 정선의 부감법
미학자 고유섭은 그림을 그리는 데에 있어서 대상의 관찰법을 서양인은 '보고 있다' 이고, 동양인은 '보아 간다' 라고 시원스럽게 정의했다. 르네상스에서 러시아, 그리고 동양산수화로 올 수록 대상을 지각하는 방식이 점차 총체적, 그리고 우주적으로 변화한다.
북송시대 곽희가 정리한 삼원법(고원,평원,심원)으로 그린 산수화(왼쪽 그림)가 그렇고, 하늘에서 독수리가 내려다보는 듯한 부감법으로 금강산의 봉우리들을 한 화면속에 배치시킨 정선의 그림(오른쪽 그림)이 그러하다. 사물을 스냅사진 찍듯 정지된 시각이 아니라 관찰자 자신이 직접 보아 갔던 경험들을 기억해서 종이 위에 집대성하는 방식이다.
만약 누군가 우주를 그릴 수 있는 능력으로 그림을 해냈다면, 그것은 동양인의 공간감을 사용하는 화가일 것이다. 대상을 재현하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방법 같은 건 없다. 가장 정확하다고 믿어왔던 르네상스 원근법과 투시법조차 세계를 표상하는 수많은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이다. 물론 내 취향은 동양인들의 공간감이지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대상을 재현하는 존재하는 수많은 공간법, 원근법은 우열을 매길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예술의지(Kunst wollen)의 차이이기 때문에.
@thelum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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