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터렐
예술은 현대 미술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현대미술은 더이상 아름답기는 커녕 추하기까지 하다. 이제 미술은 전통적으로 추구해왔던 '미'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것들을 열망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숭고'의 미학이다.
미에서 숭고로
우리는 살아가면서 삶의 전환점을 느끼는 체험을 한두번씩 하게 된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 변하거나 혹은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는 체험 말이다. 가령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느 순간 신을 영접하는 체험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후의 삶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로 기억될 것이다. 어떤 현대미술은 "오 작품 좋은데?" 같은 단어로 평가받길 거부한다. 그걸 넘어서 거의 종교의 경지로 자신을 끌어올려 관객이 전율하기를 원한다. 이런 예술가들이 노리는 것은 숭고의 미학이다.
마크 로스코
주체의 죽음
작품이 미에서 숭고를 지향하는 것은 단순한 변화가 아니다. '미' 안에 종속되어 있었던 근대적인 예술의 성격을 벗어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기도 하다. 과거의 '미'를 지향했던 예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재인식의 쾌감'에서 비롯된 아름다움이다. 재인식이란 원상의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모방한것을 다시 재차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의 초상화를 그렸을때 '와~ 정말 똑같다!'라고 감탄하는 것, 그리고 거기에다 약간의 화가의 역량으로 빛을 조절하거나 등등.. 아름답게 원상을 꾸미는 것, 이것이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져온 회화의 역사이다.
하지만 이런 예술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아까 예를 들은 초상화의 그림은 어떻게 되었던간에 원상을 나타내는 일방적인 가르킴이다. 회화는 어디까지나 '객체'로 머물러야 했다. 왜냐? 회화란 '주체(원상)'인 어떤것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넓은 의미로도 작용하는데 가령,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그림을 보고 '아~ 이것은 고흐자신의 자의식의 표현이야' 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 그림은 오직 예술가를 나타내는 '객체'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숭고를 지향하는 예술작품은 이렇게 어떤 형태로든 '객체'이기를 거부하고 작품자체를 전면으로 내세운다. 고전적 의미의 주체는 이제 작품안에서 죽음을 선언했다. 예술작품을 어떤 특정한 주체에게 귀속시키는걸 거부함으로써 작품은 사물의 모방이나, 예술가의 머릿속이나 낭만따위를 모방하기를 포기하고 작품자체가 '주체'가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은 예술가를 통해서 나오지 않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여기서 말하는 주체의 죽음이란 창조자를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작품이 항상 특정한 주체에게 귀속되어 있었던 어느 '독단적인 주체의 죽음'이라고 할수 있겠다. 생각해보라, 작품이 어느 특정한 것을 가르키는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도 얼마나 풍요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겠는가?
올라퍼 엘리아슨
체험의 장소
작품은 비로소 예술가에 의해, 어떤 다른것에 의해 독립되었다. 이제 숭고미를 위한 기본 베이스는 갖춰졌다. 그럼 본격적으로 작품에서 숭고를 느낄 수 있는 요소를 찾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작품의 '사건성'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가 오늘날 사물을 대하는 것은 존재 망각의 태도라 한다. 사물은 그 안에 원래 그것만의 세계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든 것들은 도구주의적 관점에서 보고, 해석되고, 판단된다. '세계'를 망각한 도구적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잔이 사물을 '탄생의 순간'에서 포착하여 그렸듯이 예술 작품은 작품으로서 잊혀졌던, 그동안 망각되었던 세계를 열어주어야 한다.
가령 옛날 그리스시대의 장인들은 신상을 만듦으로써 신들을 비로소 존재하게 만들었다. 또 관객들에게 신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때 세계를 보여주던 숭고했던 그리스 신상들은 모두 박물관에 진열되어 한갓 미적인 향유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박제된 미술이나 도구적 미술로는 숭고의 체험을 할 수가 없다. 예술 작품은 이제 망각되었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한다. 숭고를 지향하는 작품은 현장을 진동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의 잠들어 있었던 감각을 깨어나게 만든다.
바넷 뉴먼
숭고의 부정적 묘사
그럼 '숭고'의 느낌이란 도대체 어떤 느낌인가? '미'가 우리의 지각으로 충분히 느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숭고'는 우리 지각 밖의 초월적인 어떤 것이다. 가령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기 전의 느낌은 한 눈에 절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지각의 범위를 넘어선 그 거대함 앞에서 우리는 뭔가 두렵고 불쾌한 감정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산을 정복했을 때에는 한 없는 열락의 쾌감을 느낄것이다. '미'와는 차원이 다른 이런 느낌, 숭고의 감정이다.
대표적으로 숭고를 지향했던 예술가는 바로 바넷 뉴먼이다. 뉴먼이 보기엔 여태까지의 예술가들은 숭고의 열망이 있었지만 언제나 '미'안에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은 '미'안에 종속되지 않는, 숭고를 향한 예술을 이제부터 추구해야겠다고 했다. 사실 나 역시 뉴먼을 작품을 실제로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숭고를 지향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은 이렇게 인터넷이나 인쇄된 책자로 느낄수 있는 것이 아니다.
뉴먼은 자신의 거대한 작품을 아주 근거리에서 감상할수밖에 없게끔, 전시했다고 한다. 한 눈의 지각 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색면속에서, 열락의 감정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보라. 아무것도 없다. 바탕을 원색으로 뺑끼칠하고 수직선 몇개만 그냥 그어놓았을 뿐이다. 리요타르에 따르면 이러한 것이 바로 '숭고의 부정적 묘사'이다.
숭고의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느낌들을 어떻게 캔버스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낼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이 자신의 무한한 존재를 유한한 형상속에 가둬두지 말라고 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이 말할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듯이, 그는 캔버스 속에 아무 형상도 나타내지 않음으로써 역설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숭고를 표현했던 것이다.
바넷 뉴먼과 로스코과 페인팅으로 숭고의 전략을 취했다면, 제임스 터렐과 올라퍼 엘리아슨같은 동시대 미술가들은 라이트닝 아트를 통해 숭고 미학을 지속하고 있다.
제임스 터렐
@thelump
참고문헌 : 진중권.<미학 오딧세이>,<현대미학-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초간단 미술사] 지난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