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記] 간디가 바라본 무위(無爲)의 삶이란 무엇인가? /부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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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여년이 흘렀다. 내 머리를 너무나 강렬하게 때려 주어 정신차리게 해주었던 책,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간디가 해설한 바가바드기타 - 이현주 옮김, 개인적으로 이아무개란 필명을 가진 이현주 목사님을 존경한다. 그분의 4주간 강의(물론 직접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냥 강의를 들었을뿐이다. 이 바가바드기타의 강의 말이다. 쉽게 풀어읽는 바가바드기타라는 이름으로 녹취록이 출판되었다.)를 들었을때 영혼이 시원하게 씻겨져 내린 느낌이었다. 물론 사람의 느낌은 상황따라 변해간다. 그 시점, 그 시절의 인연이 있었기에 그 순간의 감응이 물결쳐서 동조화되는 것이다. 그당시 나는 정신적으로 참 힘들었다. 결혼하려는 여성과의 종교적 견해때문에 진통이 있었다. 그녀는 재림예수를 믿는 신흥 기독교의 신자였다. 종교에 대해서는 그다지 이질적이지만 않으면 별 상관이 없다는 기본적인 성향 탓에 큰 문제가 될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서로 존중만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천성적으로 자유/해방을 추구했고 남의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탓에 그녀의 종교도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전제로 관계가 발전되기 시작되면서 부터 종교문제가 그렇게 커질줄은 몰랐다. 나는 공포/두려움을 조장하는 세뇌적이고 교조적인 입장을 극히 싫어한다. 그러나 그녀의 종교는 그러했다. 특히 In the name of라는 명제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몹시 혐오한다. 개누리당(지금은 지 멋대로신한국당이란다)도 싫지만 적폐청산이라는 이름하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운동권도 사실은 싫다. 인간은 본래 깨끗할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적폐청산이라는 표현은 과격하고 너무나 이분법적이다. 본질이 왜곡되어 교묘하게 마음속 증오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서 싫다. 너무나도 자극적이다. 하기야 사람들은 선동적이고 충동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가보다. 그래서 조화를 이룰수있을까? 내로남불이 걱정된다. 그래서 그런지 으쌰! 하면서 경쟁을 부추기는 회사생활도 내게는 참 힘들었나보다. 결국은 헤어졌다. 하지만 그녀와의 인연으로 나의 인생관이 갑자기 바뀌었고 그 시절 내게 많은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이 책, 그래서 내게는 이 책이 아주 소중하다. 그리고 간디를 통해서 사람이 살아야하는 이유와 목적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왜 사람들이 간디를 좋아하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한다. 또한 그녀가 나로 인하여 받았을 상처도 함께했던 즐거운 추억속의 미소와 미안함으로 물들어 그녀에게서 잔잔한 자비심으로 변화되길 기원한다. 하긴 16년이 흘렀으니 강산이 한번 바뀌고 또 반이나 바뀌었다.


노자의 특허품으로 알려진 이 무위(無爲)/함이 없는 함은 모든 전승지혜의 기본토대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비심에 근거한 지혜이다. 나는 힌두전통의 바가바드기타, 그리고 간디가 주석한 이 해설서를 통해서 그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인생살이란 무엇보다 영적 성장을 위한 도 닦음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연한 계기로 16년 전 그당시에 형광펜으로 밑줄 그었던 내용들을 다시 보게되었다. 너무나 좋은 구절이 많기에 모두 남겨 놓는다. 30세의 내가 이책 곳곳에 그은 형광팬의 새김은 내 마음속에도 여전히 마르지 않았다. 그리고 간디의 신, 그것은 바로 신에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헌신이다. 신과 함께한다는 확신 속에서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자리잡을 공간이 없다. 미래도 걱정없고 과거에 대한 미련도 없다. 이게 바로 간디의 믿음이었다. 신앙(信仰/우러름)이 아닌 안으로 향하는 내적인 신심(信心)이었다.

신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기에 두려울수도 슬퍼할수도 없는 그런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면서 유신론자이다. 그리고 무신론자도 아니고 유신론자도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바로 그 이름이 신일뿐이다. 그것은 자비심이 충만한 지혜이다. @peterchung

ps. 내용이 많다. 쓰고 보니 비슷한 내용들이 반복되었다. 세뇌(Brain washing)를 거부한다는 말은 구라였다. 길다 싶으면 아무데나 한 두 구절만 읽어도 된다. 시간 많은 분들은 차분하게 읽으시길 바라면서 음악을 삽입시켰다. Bob James의 In the garden/Cannon





간디는 1926년 2월 25일에 시작하여 11월 27일까지 9개월 동안 날마다 이 바가바드기타를 해설하였다. 새벽기도를 마치면, 그의 강의와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토론이 이어졌다. 이 책은 두 충실한 필기자의 기록에 의하여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

ps. 이렇게 좋은 책이 절판이 되었다는 것이 참 아쉽다.



사람이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맹목의 사랑이나 증오에 휘둘리지 않으면, 폭력은 생길수 없다.


기타는 우리를 편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정신적 문제를 만날 때마다, 자기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그리고 나서 어떻게 할지를 결정한다면 그대들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리 크리슈나가 열여덟 장에 걸쳐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이다.



쾌락과 고통, 얻음과 잃음, 승리와 패배를 똑같이 여기고 싸움에 임하여 허리띠를 단단히 매고 있을지어다. 그렇게 하면 죄를 짓게 되지 아니하리라. [제2장 38]

목표가 확실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나약해지고 너무나도 불안하여 그 순간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된다.


이제까지 벌어들인 수십만 루피에 만족하지 않고, 내일 또 수십만 루피를 벌어들이고 싶어하는 자, 오늘 '마하트마'로 행세하면서 훗날에도 그렇게 대접받기를 희망하는 자, 이런 사람의 마음은 온갖 잡념과 환상으로 어지럽혀져 있다.


행위만이 본분이요 그 열매는 아니니라. 행위와 열매를 동기로 삼지 말 것이며, 행위를 피하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제2장 47]

오, 다난자여. 집착 없이 행동하면 요가에 굳게 서고 성공과 실패에 마음 고요할지어다. 마음의 고요함이 요가이다. [제2장 48]


그대들의 권리는 일하는 것이지 그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감각의 대상들을 품에 안고 있는 사람한테서 그것들에 대한 애착이 솟아나느니, 애착은 열망을 낳고 열망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마비를 낳고 마비는 기억상실을 가져다주고 기억상실은 이성을 파괴하고 이성의 파괴는 철저한 파멸을 이끄는도다. [제2장 62, 63]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어버린 사람은 분별력을 잃고 만다. ... 그러므로 사람은 감각이 대상을 향해 갈망하려는 순간에 그것을 근절해야 한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상상 속에서 감각을 즐겁게 해주는 대상에 머무는 습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하여 사람은 끊임없이 신을 생각해야 하고, '사마디'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이 살아야 한다.


사실상 화를 내는 순간 그는 지독하게 어딘가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믿음의 사람은 어려움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일을 밀고 나간다. 그는 실패라는 걸 모른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세상이 실패라고 보겠다면 보라고 해라. 나는 그런 것 모른다. 무심(無心)으로,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일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아무것도 희망하지 않고 끈기 있게 일한다. 그는 잔꾀를 부리지 않으며 결코 결과를 서두르는 법이 없다.


나타난 어떤 결과 뒤에는 그것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작용한 수천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을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이룰지어다. 집착하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사람은 지고자(至高者, the Supreme)에 이르느니라. [제3장 19]


우리는 무지한 자들과 똑같이 일을 하되, 다만 그들처럼 일에 집착하지는 말고 일해야 한다. 우리도 그들처럼 곡괭이를 들고 일해야 한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부지런하고 열심을 내어 노동하되, 다만 세계의 유익을 위하여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심으로 해야 한다.


또, 무엇을 얻으려니 하는 생각은 아예 지니지 말고 어떤 유익이 있을까 없을까 계산하지도 말고 다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라는 자세로 카르마를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는 에고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일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네가 카르마의 행위자라는 생각을 품지 말고 또한 그 결실을 즐기려는 마음도 먹지 말고, 자기가 마치 돌아가는 물레의 가락이듯이, 스스로 빛을 내는 램프의 심지인 양 그렇게 행동하라고 크리슈나는 말한다.


사람은 자기가 맡은 일(임무)에 대한 조바심과 걱정을 모두 비울 때만 그 일을 할수 있다. ... 아르주나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하여 지나치게 흥분하지 말고, 그러니까 애착도 혐오도 품지 말고, 그 일을 하라는 요구를 지금 받고 있는 것이다. 애착과 혐오에서 벗어나는 것이 자기 임무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폭력이란, 어떤 사람의 목을 치는 행위 속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행위의 동기 속에 있는 것이다.


욕정, 두려움, 분노에서 벗어나, 나로 가득 차고, 나에게 의존하고, 지식의 뜨거운 시련에 정련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나와 더불어 하나가 되었도다. [제4장 10]


애착과 두려움과 분노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이 신을 깨닫는다고 말한다. 애착과 분노에 굴복한 사람은 신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했다. 분노에 무릎 꿇은 사람은 분노의 열매를 거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분노에 굴복하지 말고 애착과 두려움과 분노를 지워버리라는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욕망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래서 세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한다. 자신의 일에 충실한 대신 늘 불만감에 젖어 있는 사람은 이 세계-기관에서 자기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다.


탐욕스런 인간은 자신이 탐욕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리하여 마침내 탐욕의 화신이 된다.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은 아주 위험하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의 열망 속에서 자신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임무는 자기를 실현하기 위하여 애쓰는 것이고 그 목적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


나에 관한 이 진리를 아는 자마다 결코 카르마(행위, 業)에 묶이지 않느니라. [제4장 14]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다만 그 몸으로 행위를 행하는 사람, 그는 아무 오점도 남기지 않느니라. [제4장 21]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신의 법을 아는 사람은 일을 하되 그 일을 통하여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일에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일을 하면서 우리 속에 있는 '나'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결코 조바심 내거나 근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일에 깊숙이 몰입되어 언제 그 일을 그만둘 것인지도 모르는 그런 정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계처럼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탐욕스런 사람은 자신의 탐욕 안에서 자기를 잃는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쾌락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자신의 방종에 싫증을 낸다. 쾌락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것에 대해 조만간 싫증을 내게 마련이다.


우리의 모든 행위 뒤에는 자기중심성(egotism)의 흔적과 '나'에 대한 집착이 숨어있다. 우리의 행위는 의지(will)의 실현인 것이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그 일들 하려고 마음을 먹고 또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욕망의 대상으로 쏠리는 마음에서 자유로울때, 그때 그는 요기라고 불리느니라. [제6장 18]


소유를 포기하는 데는 소유코자 하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왕국을 손에 넣고자 혼자서 '자파'[japa, 영력이 있는 이름이나 주문을 반복하여 부르는 일]를 하는 자는 요기가 아니다. 날마다 자선을 베풀면서 끝없이 돈 생각만 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몇십만 루피를 소유한 자가 덜 탐욕스러울 수 있다.


우리는 몸에 필요한 것을 최소한으로 채워주어야 한다. 다만 그것을 더 많이 늘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몸에 필요한 것을 더 많이 늘리려고 하다 보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끝없이 거듭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못하면, 산들바람이 등불을 꺼뜨리듯이 감각의 욕망이라는 바람이 '아트만'을 꺼뜨리고 만다. 등불이 공기에서 음식을 취하듯이 '아트만'은 감각과 생각을 통해 필요한 음식을 취한다. 등불은 움직이지 않은 공기에서 음식을 취한다. 마찬가지로, '아트만'은 우리가 마음의 충동을 고요하게 만들 때 거기서 자양분을 취한다.


만일 우리가 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린다면 우리 마음이 아직 탐욕과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라고 알면 된다.


포기를 수행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죽은 뒤에, 행위의 세 가지 열매인 불쾌함과 유쾌함과 그 둘이 섞여 있는 것이 돌아가거니와 샨냐시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돌아가지 않는도다. 오, 마하바후여, 모든 행위의 완성을 위하여, '상키아' 교의에 있는 다섯 가지 행위의 요소를 나한테 배울지어다. 행위의 장소, 행위하는 자, 여러가지 수단, 몇 가지 서로 다른 실천 그리고 다섯번째이자 마지막인 보이지 않는 것이 그것이니라. [제18장 12~14]

열정을 가지고서 행위의 열매를 갈망하며 탐욕스럽고 폭력적이고 깨끗하지 않게 행동하며 기쁨과 슬픔에 휘둘리는 자를 '라자시크'한 행위자라고 부르느니라. [제18장 27]

비록 내키지 않더라도, 좀더 쉬워 보이는 남의 임무보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더 낫느니라. 자기의 타고난 임무를 다함으로써 사람은 죄를 짓지 않게 되느니라. 오, 카운테야여, 사람은 자기가 태어나면서 가지고온 임무를, 비록 그것을 완전히는 이루지 못한다 해도, 포기해서는 안되느니라. 왜냐하면 사람의 모든 행위가, 연기 속의 불길처럼, 처음에는 불완전함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니라. [제18장 47, 48]

온갖 종류의 집착에서 자신을 떼어낸 사람, 자신의 주인인 사람, 욕망에 대하여 죽은 사람, 그런 사람은 포기를 통하여 모든 행위에서 자유로운 지상의 완전함을 성취하느니라. [제18장 49]

오, 바리타여, 그대 마음을 다 쏟아 오직 그분 안에서 안식처를 찾을지어다. 그분의 은총으로 그대가 지극한 평화의 영원한 안식처에 이를 것이니라. 이제 내가 그대에게 모든 지식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지식을 드러내 보였으니, 마땅히 깊게 살펴보고 그대 뜻대로 실행할지어다. 모든 신비들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 위 없이 높은 내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그대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이기에 거듭 이르노라. 나에게 그대 마음을 고정하고, 나에게 그대 제사를 드리고, 나에게 절할지어다. 그대에게 준 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오직 내게로 올지어다. 그대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자로다. 모든 일을 포기하고 그대의 유일한 안식처인 내게로 올지어다. 내가 그대를 모든 죄에서 풀어주리니, 그대는 슬퍼 말지어다! [제18장 62~66]


첫번째 의지(삿트바의)는 신께 자기를 바치는 것이요. 두번째 의지(라자스의)는 집착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바로 그 집착 때문에 사람들은 다르마, 아르다(재물, 권력), 카르마(쾌락)를 추구한다. 그런 사람의 결정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여기서 '산냐사'가 뜻하는 바는, 모든 행위를 무조건 포기하는(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모든 행위의 열매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포기만이 성공적으로 실천될 수 있다.


무엇을 아는 자는 그 지식을 써먹을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가져야 한다. 모자람이 없는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행동으로 완벽하게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맺음말


하나는 그 동기에 자기중심적인 요소가 없어야 하고, 둘째 그 행위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는 게 없어야 한다. 반면에 오직 세상의 유익을 위한 것이고 세상에 유익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되었다면 아무리 거칠고 난폭한 행위로 보여도 아힘사(비폭력)의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신을 찾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것, 그러니까 모든 행위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행위를 다포기하기가 불가능한 일이기에 우리는 할수 있는 만큼 일을 적게 하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는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신을 찾는 일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초인적인 힘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일은, 스스로 겸손해져서 순간마다 '아트만'의 행복을 위해 일하겠다는 마음의 멍에를 지는 것이다. 그뿐이다.


우리도 그처럼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비로소 치유받을 것이다. 위기를 느끼기 전까지는 치유받지 못한다. 그 경험은 산모의 진통과 같다. 아르주나의 경험은 사람이 거듭 태어날때 그를 엄습하는 그런 경험이다. 우리 모두 그것을 경험해야겠다. 이런 생각(느낌)을 잃지 않고 계속 지니고 있으면 우리는 언제고 구원 받을 것이다.


남의 다르마를 자기 것보다 못하다고 보지 않고 각자 자신의 다르마에 충실할때 제자리를 온전히 지키게 될 것이다.


'스와다르마'는 순간순간 우리에게 떨어지는 일거리를 뜻한다. 우리는 남들이 우리에게 맡겨준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양심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양심이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자신한테서 '나'를 추방할 때 신이 그 빈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예속되기를 용납해야 한다. 어디서든지 그분이 일거리를 주시면 마음을 모아 그 일을 하는데, 구미에 맞지 않거나 폭력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렇게 폭력이 가득 찬 세상에서 그런 일이 우리에게 떨어진다면 우리는 그 일을 해야 한다.


아이든 어른 이든 몸이 으스러질 때까지 주어진 일에 매달려야 한다. 이것이 본질적인 명상(internal meditation)이고, 이것이 베단타다.


우리는 자기가 하는 일에 온전히 몰입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몰입이 이기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결국 우리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질 것이고, 신께 바쳐진 것이라면 우리를 일으켜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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