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르란 원래 플라톤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다. 플라톤의 시뮬라크르란 이데아가 존재하고 그것을 모방한 복제, 그리고 그 복제를 또 모방한 복제의 복제(simulacre)이다. 여기에는 이데아에 가까운 복제일수록 더욱 권위를 인정받는 위계 질서가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에서의 시뮬라크르란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매체와 미디어의 발달로 인해 이제 시뮬라크르는 원본과 차이를 두지 않는 복제, 때론 원본보다 더 실재적인 복제, 심지어 원본없는 복제로 변화하였다. 무슨 말이냐고?
르네 마그리트
지각의 변화
과거 사람들은 진짜와 가짜, 원상과 복제의 개념,구분이 '뚜렷'했다. 그들이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유일무이한(원본) 것이었다. 가령 대장간에서 만든 연장, 동네 양복점가게에서 맞춘 양복, 직접 수놓아 만들었던 옷,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짚신, 등등.. 그것들은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들의 세계관 역시 그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내가 지급 입고있는 옷, 내가 가지고 있는 핸드폰, 펜, 디카, 가방 등등.. 수천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다. 때문에 옛날에는 물건 하나하나가 소중했지만 지금은 조금만 유행에 뒤떨어지면, 다시 대량복제된 새로운 다른것을 손쉽게 구입할수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윗세대인 부모님만 해도, 자신의 세계관은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나'의 세계관은 태어날때부터 텔레비젼이라는 복제영상문화에 의해 대부분이 이루어진다. 직접 가보지 않고, 겪지 않은 것들의 이미지도 얼마든지 텔레비젼에 의해 머릿속에 어렸을 때부터 환영되었다. 사진과 텔레비젼의 발명, 영화와 인터넷의 발달은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의 지각방식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기술복제된 매체들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대중문화, 사회, 철학, 예술 등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백남준
팬텀과 매트릭스
그럼 현대인들의 지각을 지배하고있는 매체영상의 정체는 무엇인가? 어젯밤 나는 TV를 통해 잉글랜드 축구경기를 생중계로 보았다. 하지만 내가 보고 즐겼던 그 영상의 정체는 실제인가 가상인가? 분명 어젯밤 우리집 거실에서 22명의 선수들이 공을 찼던건 아니었음으로 그것은 어떤 의미로 명백히 가상이다. 하지만 그 시간에 분명히 잉글랜드에서는 축구경기가 실제로 존재했다. 여기서 실제와 가상, 원본도 복제도 아닌 애매모호한 것을 '팬텀'이라 한다.
또 팬텀들을 구성하여 네이버 메인 뉴스화면처럼 판을 짜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방식, 이것을 '매트릭스'라고 한다. 현대인들의 지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매체속 뉴스나 신문은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 물론 신문이나 뉴스에 나온 기사나 보도는 모두 사실이고 실제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현실이 아니며 왜곡이다.
과거 언론이 사건 자체를 변형하고 거짓으로 보도했다면 현대에서는 더이상 그런 고전적인 방법은 쓰지 않는다. 세월호 사건에서처럼 주의를 딴 곳으로 돌리거나 나머지 자질구레한것만 계속 보도함으로써 사실을 가린다. 현대인들의 판단력은 이렇게 언론이 '무엇을 왜곡할 것인가'가 아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의해 왜곡된다. 한쪽에서는 세계를 짜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서는 그 세계를 인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가 이제 사실이고 현실이며 실제가 되어버렸다. 과거에는 사건이 먼저 존재하고, 나중에 그것을 기사화해서 보도했다면 지금은 보도자체가 사건화된다. 무슨말이냐 하면 아무리 중대한 사건이라도 보도가 되지 않으면 사실이 되기 힘들기 때문에, 이제 모든 보도는 사건을 따라가는것이 아니라, 모든 사건은 보도를 따라간다. 가끔 tv에서 나오는 정치인들의 단식투쟁같은 것도 진정한 것이라기 보다는, 보도되기 위하여 사건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보도(복제)의 사건(원본)화. 여기서 또 원복과 복제의 관계는 뒤바뀐다. 아직도 우리가 TV를 보고있다고 생각하는가? 천만의 말씀, TV는 우리를 보고있다.
매트릭스
아우라의 붕괴
이렇게 사회적으로도 원본과 복제의 관계가 흐릿해질때, 고유의 것, 원본의 것이라고 믿었던 마지막 영역의 예술 작품마저도 원작성이 파괴된다. 오랫동안 회화란 수공업으로 제작한 세계를 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손가락만 까딱하면 언제 어디서든 무한 복제가 가능해짐으로 인해, 일단 회화는 그 원작성의 위기에 처한다.
또하나, 벤야민은 기술 복제시대의 예술작품들이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했다. 아우라란 단 하나밖에 없는 원본의 예술을 직접 대면했을 때의 그 느낌, '지금, 여기'의 현존성에서 풍겨나오는 분위기이다. 사진이나 영화의 예술을 보라, 거기에 '원본'의 의미가 있을까? 전세계 동시상영되는 영화에서 원본필름을 상영하는 극장에서 돈을 더 많이 받는것은 결코 아니다. 원본을 마주했을 때의 일회적 느낌이었던 아우라는 기술 복제의 예술시대에는 이로써 붕괴된다.
하지만 원본의 의미상실은 예술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특권층의 소수만 누렸던, 아우라라는 일종의 제의적 분위기속에 휩싸여 있었던 예술 작품들은 이제 기술 복제의 힘에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상할 기회를 넓혀주는 '전시 가능성'이 증가된다. 미술품 수집가는 원작성의 가치에 따라 그림을 수집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영화라도 한 개인이 소유할 수는 없는것이다. 기술복제는 전시기회를 증대함에 따라 예술의 민주화를 부른다.
(2)에 계속..
참고문헌.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진중권. <현대미학 -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thelump
[초간단 미술사] 지난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