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보다 비가 좋다. 비 오는 날 아침에는 커튼이 한 톤 낮은 색깔을 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빗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수 없게 되었다. 고층 아파트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이제는 색채를 구별하거나 습기를 느끼는 것으로 비가 오는 것을 알아챈다. 그럴 때 내가 깊고 깜깜한 굴에서 몸을 말고 자는 야생 동물 같다고 느낀다. 비 오는 날은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 동시에 침대에서 하루 종일 머무르고 싶다. 이불에 몸을 파묻는다. 거실 밖에서 개가 나오라고 문을 긁는다. 개는 내가 깨어났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내가 잘 때와 깨어있을 때의 숨소리를 구별하는 걸까.
몰입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하나 있다. 바로 다이아나의 발바닥 털을 정리하는 일이다. 거실 바닥이 미끄럽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깎아주어야 한다. 개는 싫은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 다이아나는 내가 가위질 하는 시간을 잘 참아내었고, 마침내 맛있는 간식을 쟁취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중학교 1학년 때 읽었다. 그 때 나는 K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이상하게도 항상, 언제나, 먼저 고백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K에게 엽서를 보냈다.
그 해 봄에는 비가 많이 왔다. 나는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다가 빗소리에 잠이 깨곤했다. 매일 아침, 혹시나 오늘은 K를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로 가득차 있었던 시절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K와 연결되는 기분이 들었다. 비는 공기보다 질량이 높은 액체였고 내 살갗과 K의 살갗에 스며들어 우리의 영혼을 이어줄 것 같았다.
K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감정에 계속 취해있고 싶었기 때문에 밤마다 편지를 썼다. K는 나의 긴 편지에 답장을 잘 보내지 않았다. 가끔 한 번씩 짤막한 엽서를 보내왔다. 어느날 길에서 K와 마주쳤는데, "넌 작가같아.",라고 말했다. 차라리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면 돈을 쫓지 않고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뉘앙스는 뭔가 애매한 구석이 있었다.
난 K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베르테르적 비극을 마음껏 즐겼다. K를 사랑했다기 보다는 내가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경험하는 그 착란적인 감정 자체를 사랑했던 것 같다. K가 대학에 입학하고 내가 고3이 되었을 때 우리는 남포동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K는 나에게 돈까스를 사주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신입생 환영회때 운명적인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K는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내가 K에게 보냈던 수 십통의 편지와 함께.
비가 그쳤다. 개와 함께 산책을 했다. 네 잎 클로버 찾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비가 진드기를 다 씻었을 테니까.
생각의 단편들
어떤 혹등고래 위에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는 것
꽃이 기다린다
파란 우연
산책자
어젯밤 꿈이 나에게 말해준 것
도착을 더듬으며
춤추는 생각들
종이 눈꽃을 노리는 시간
출발하기 위해 도착한다
비 맞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