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삼성 고위임원들이 아파트를 빌려 자행했던 성폭력, 이른바 ‘난교파티’, 황교안과 적폐 검사들까지 피처링하는 추악한 권력의 뒷거래 실상... 의혹 제기 수준이 아니라 수사까지 얼마간 진행된 사실이지만 당연히(!) 저들의 메시지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선택적 과장과 침묵을 통한 여론 조작인 거죠."
김어준 총수가 다스뵈이다 12회에서 한 발언을 두고 한 바탕 논란이 있었네요. 저는 방학 마지막 주를 맞아 2박 3일 일정으로 ‘이사에 준하는 봄맞이 대청소’ 중이라 뒤늦게 관련 뉴스를 접했는데요. 그리고는 시간을 쪼개 함께 사는 여왕님이랑 2시간 분량의 해당 동영상을 챙겨보았습니다. 다 보고 나니 15년도 더 지난 기억이 떠올라서, 한참 주저한 끝에 글을 쓰게 됩니다.
‘해일과 조개’의 아픈... 그리고 화나는 추억
2002년이었습니다. 저는 개혁당 당원이었죠. 개혁당 당원 중에는 노사모 소속이 다수였지만 저는 노사모 회원은 아니었습니다. 또, 97년 대선 때 국민승리21에 가입했었으나, 이후 소위 NL계와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민주노동당에는 참여하지는 않은 상태였구요. 저 개인에 대한 배경 설명은 이 정도로...
문제의 발언은 당시 있었던 ‘지역 당 MT 성폭력 사건’의 처리를 둘러싼 논쟁 과정에서 불거졌습니다. 당시 롤러코스터를 타던 노무현의 지지율, 소진되어 가는 당력 등에 초조했던 당 지도부는 여성회의 중심의 문제 제기에 대해, 가해자에 대한 처리를 우선하되 당장 목전에 둔 대선에 일단 집중하고 유사 상황 재발 방지, 왜곡된 성의식 타파 등을 위한 제도적 장치는 시간을 두고 만들어 가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저의 입장은 '당 지도부의 초조는 이해하나 대선에 집중해야 할 당력을 일부 할애해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 가지 않으면 결과적으로는 대선에도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 입장에서 논쟁의 포인트는 유시민 씨가 했던 ‘여성회의는 개혁당의 여성회의냐, 아니면 여성운동에 당을 활용하려는 것이냐.’라는 요지의 발언이었습니다. (오래 전의 이야기라 정확한 워딩은 아닐 수 있습니다.)
정당이란 정권 획득을 통해 정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므로, 유시민 씨의 표현에서 묻어나는 이분법은 언어도단이라는 것이 제 입장이었죠. 각계 각층의 이해관계와 신념을 응축한 것이 당의 정강인데 당이냐 여성주의냐를 선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앞서 말했지만, 논쟁은 격화되었으나 중대선거를 앞둔 상황인지라 저 역시 당시 유시민 씨의 처지를 상당 부분 이해하는 쪽이었으므로, 여기까지는 ‘아픈’ 추억이 되겠습니다. ‘화나는’ 추억은 다음부터...
조중동을 중심으로 한 언론에 의해 이러한 논쟁이 ‘조개와 해일’ 발언으로 논점이 비틀리기 시작한 거죠. 당시 유시민 씨의 워딩은 ‘해일이 몰려오고 있는데 조개껍데기를 줍고 있는 아이들을 보는 듯하다’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저는 ‘해일’이란 당시 안팎으로 위기를 겪던 노무현 후보 쪽의 상황, ‘조개껍데기’는 MT에서의 성폭력과 관련된 쟁점, 아이들이란 그 쟁점에 발목잡힌 당내 상황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요컨대 대선보다 성폭력을 작은 일(덜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쪽, 대선보다 성폭력이 큰 일(더 근본적인 일)이라 생각하는 쪽, 그리고 저처럼 두 가지를 별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쪽 사이의 어쩌면 생산적이었을 수도 있는 당내 논쟁이 ‘조개’라는 불순한 성적 암시를 담은 표현을 중심으로 주류 언론에 의해 비틀리면서 감정싸움과 상호불신으로 치닫더라는 거죠. 남성패권주의자, 꼴페미... 그리고 저 같은 회색분자가 보일락말락 등장하는...ㅠㅠ
‘미투’, ‘공작’, 그리고 이재용
대청소로 정신없는 와중에 다스뵈이다 12회를 꼼꼼히 봤습니다. ‘가카 배웅 방송’에서 ‘이재용 헌정 방송’으로의 전환을 선언하는 방송이더군요. 나꼼수 출신 3인의 끈질긴 열정과 결기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양반들 정말 치지지도 않는구나...’ 그리고 문제의 발언...
발언 내용은 동영상을 직접 보시면 확인하실 수 있을 테지만 (바라건대 해당 부분만 잘라서 보지는 마시길... 모든 언어는 ‘정황적’이니까요) 제가 해석하기로는 궁지에 몰린 이재용 측과 그에 부역하는 삼성 관계자들이 문재인 정권을 흔들고 진보 진영을 분열시키기 위해 ‘미투’ 문제까지도 공작에 활용할 수 있다는 요지로 들렸습니다. 프레임 전환을 위해서는 양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세력이니 경험상 이러저러한 공작이 예측 가능하다는 정도...?
제가 보기엔,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듯, 진영 논리에 빠져 ‘우리 쪽’의 허울은 적당히 덮자는 요지는 아니었다는... 물론 저와 달리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그 분들의 해석도 충분히 인정하고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말씀 드리자면, 한편으로는 과거 황우석 파동 당시 김어준 총수의 입장과는 반대 입장에서 논쟁을 했던 적도 있는 만큼 맹목적인 김어준 추종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고, 다른 한편으로 김 총수의 몇 차례 헛발질과 관련해서는 ‘절대적 정보 불균형 상태에서 권력에 대항해 의혹을 제기하는 자에게 의혹 제기가 틀렸다고 해서 지나치게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는 정도만 밝혀드립니다.
어쨌든 SNS를 중심으로 관련 발언의 앞뒤 맥락을 잘라낸 게시물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금태섭 의원의 반박이 올라오면서 논쟁이 격화되었더군요. 금의원의 페북 게시물이 ‘다스뵈이다 12회’를 본 사람들의 심기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대목은 게시물 서두에 있는 ‘이런 사람은 공중파 프로그램을 진행해선 안된다는’ 요지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삼성/이재용과의 일전불사를 선언한 김총수를 무장 해제시키려는 시도로 해석되는 거죠.
또 한 번 아픈 추억이 현실로 반복되는 거 같은 불긴한 예감... 그리고 등장 인물은...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미투 운동의 대의를 왜곡하는 마초, 진의를 왜곡해서 부지불식간에 내부 총질하는 안철수 캠프 출신 이재용 부역자... 그리고 저처럼 이도 저도 아닌 회색 분자... ㅠㅠ
회색분자의 작은 소망
여기까지는 아픈 현실, 우리가 노력하기에 따라 아픔만큼 성숙해 질 수 있는 현실입니다. 하지만 ‘화나는 현실’은 그게 아닙니다. 조중동, 특히 중앙일보를 중심으로 (그들은 그래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죠. 삼성, 이재용!) 공론장을 적극적으로 왜곡하려는 시도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점이죠.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의 논란을 능란히 비틀면서 예의 거대한 스피커로 끊임없이 왜곡된 메시지와 이미지를 전파하는 거죠. 그렇습니다. 미디어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때로는 말해진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다스뵈이다 12회에는 이재용 편법승계, MB 변호비용 대납 등,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지만, 미투 운동과 관련된 성폭력 관련 사안도 있습니다. 삼성 고위임원들이 아파트를 빌려 자행했던 성폭력, 이른바 ‘난교파티’, 황교안과 적폐 검사들까지 피처링하는 추악한 권력의 뒷거래 실상... 의혹 제기 수준이 아니라 수사까지 얼마간 진행된 사실이지만 당연히(!) 저들의 메시지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선택적 과장과 침묵을 통한 여론 조작인 거죠.
미투 운동은 지금보다 훨씬 더 뜨겁게 불타올라야 합니다. 더 가열차게 타올라서 문화계, 예술계, 연예계를 넘어, 이익의 강철 카르텔로 무장한 심장부까지 완전히 녹여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차별적 구조에 대한 성찰, 끈질긴 변화의 노력 그리고 적극적인 여론 조작에 흔들리지 않는 냉철하고 신중한 판단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저는 2일차 대청소를 마무리하러 가야겠습니다.^^ 정신없는 와중에 쓰는 글인데다 탈고할 여유가 없어 기억이나 인용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지적해 주시길... 짬나는 대로 확인하고 수정하겠습니다.
사족이 되겠습니다만, 개인적인 바람,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15년 전 진보누리에서는 '노빠/유빠', 서프라이즈에선 '민노당 출신(?) 입진보;로 협공을 당하던 아픈 추억이 반복되는 것은 개인적으로 얼마든 수용할 수 있고, 세월이 흐른 지금 노회찬과 진중권과 유시민이 잘 지내듯 언제든 치유될 일이지만, ‘저들의 프레임’과 '저들의 선택적 과장과 침묵'과 '저들의 여론조작'에 우리끼리 상처를 주고 받는 ‘화나는 추억’은 부디, 제발, 반복되지 않기를...
이상, 미력한 회색분자의 길기만 하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작은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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