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가게 주인들은 사람보다 홍차를 좋아한다. 커피가게 주인들은 커피보다 사람을 더 좋아한다. 나는 커피보다, 사람들보다, 나 자신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커피가게를 그만둔 것 같다.
가게에서 많은 사람들을 스쳐보냈다. 스트릿패션 매거진에 단골로 등장하는 아가씨, 에스프레소 한 잔을 하기 위해 매일 저녁 출근도장을 찍는 할아버지, 화요일마다 책을 선물해주는 화요일의 손님, 시 한구절을 적어놓은 종이를 매번 훔쳐가는 여자손님... 나에게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 그리고 내가 호감을 가졌던 사람들. 나는 친구가 되고 싶었던 그들을 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욕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욕심보다 언제나 부끄러움과 자존심이 앞섰다.
그 시절 언제나 기다려지는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모델같이 늘씬한 그녀는 멋지게 차려 입고 혼자 구석 테이블에 앉아 민음사에서 나온 번역소설을 읽었다.
그녀와 영화나 책 얘기를 하다가 언제 한번 따로 만나자는 말을 하고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그녀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고, 나는 전화번호부에 그녀의 이름 대신 '페드로씨'라고 저장했다.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연되었다. 내가 쉬는 날에는 그녀가 출장을 갔고, 그녀가 와인을 마시고 싶은 저녁에 나는 원두주문이 밀려 새벽까지 콩을 볶아야했다. 참지 못한 그녀가 늦은 밤에 닫힌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와서, "언니, 우리 와인 한잔만 해요." 라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당장 기계를 끄고 그녀와 와인을 마셔야했다. 그 때는 커피를 맛있게 볶아내는 것이 내 인생의 중대한 사명처럼 여겼나 보다.
번번이 무산되는 약속에 기분이 조금 상해서, 그리고 내가 세심하게 로스팅해서 블랜딩한 커피를 매번 남기다니 예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고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최근에 한 쇼핑몰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 5년이라는 공백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1초도 안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냥 지나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내 시선을 느끼고 뒤돌아 본 그녀가 나에게 아는 척 했다. 우린 그 자리에서 약속시간을 잡았다.
그녀와 만나서 알게된 사실은 내 좁은 마음을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커피를 좋아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마시지도 못했다. 그러나 가게가 너무나 멋져서 집이 먼 데도 불구하고 자주 들렀다고 얘기해주었다. 우리는 그 날 와인 2병을 비우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자정이 넘어서 헤어졌는데 신기하게 그 시절 그렇게 미쳐있었던 영화와 책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보얀's 에세이
쓴다는 것은 시냅스를 연결하는 것
관계의 견고함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집사의 편지
베니스에서 얻은 자유
첫사랑
데미안을 만나는 시간
파리에서 해 볼 6가지
요리하는 즐거움
시를 읽는 시간
당신에게 쓰는 편지
로레인 루츠가 가르쳐 준 것
질문 속의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