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교단일기] W에게 쓰는 편지 - 행복의 길은 고통을 마주하는 선택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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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행복을 즐거움이나 쾌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기원 혹은 출발점이 즐거움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쾌락을 최대한 누리고 고통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 더 많은 행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하죠. 그리하여 괴로운 것 고통스러운 것은 피해야 할 것, '두려운 것'이 되죠. 헤르메스는 이런 생각에 의문을 던집니다. 즐거움은 고통의 반대말일까? 즐거움이 플러스라면 괴로움은 마이너스일까? 즐거움은 이익이고 괴로움은 손실일까? 그것은 둘이면서 하나가
아닐까? 오히려 즐거운 고통, 고통스런 즐거움이 행복의 기원은 아닐까?..."


이 글은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더 큰 고통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 'W'에게 주는 편지입니다. 아이들도 읽어야 하기에 학교 블로그에도 게재되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죠. 일종의 본능입니다. 선생님이 좋아하는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도 그 비슷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와 회피는 결국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는 경향’에서 나온 거니까.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게 과연 ‘고통 그 자체’일까요? 그건 아닌 거 같아요. ‘고통 자체’를 피하려 한다면, 선생님은 아픈 손가락에 파스를 붙여가며 새로 마음 붙인 악기를 연습하지도, 주말마다 운동한답시고 무더위에 땀을 흘리지도, 지금 이 순간 밤늦은 시간에 책상머리에 앉아 아픈 허리를 이리저리 뒤틀어가며 이 편지를 쓰고 있지도 않겠죠.

사실 고통 자체를 피하고 싶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가만히 있으면 힘이 들지도, 땀이 나지도, 숨이 가쁘지도, 귀찮지도, 아프지도 않죠. 하지만 이런 무작용, 무기력의 상태를 달가워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아무 할 일 없이’ 반나절만 가만히 있어도 심심해서 못 견디는 것이 인간이거니와, 그런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먼저 정신적인 균형이, 그 다음은 신체적인 건강이, 결국은 생물학적인 생존까지도 위협받겠죠.

그렇다면 왜 마라토너들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고통 속에서 희열을 느끼고, 바이올리니스트나 첼리스트들은 반복된 연습으로 관절이 일그러지고 손끝이 개구리 손처럼 변한 모양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낄까? 따가운 여름 햇살, 찌는 듯함 무더위,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들일을 하며 웃음 짓는 농부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생각의 방향을 조금만 바꿔보면, 인간이 피하려는 건 고통 그 자체라기보다,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자기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고통스런 상황’이 아닐까 하는 판단에 이릅니다. 이를테면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운동, 원하지 않는 악기, 강요된 노동이 주는 고통 말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라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선택의 동기에 걸 맞는 ‘보람’ 또는 ‘보람에 대한 기대감’이 대가로 주어지기 때문에 충분히 감내할 수 있고 즐기기까지 하는 것 아닐까요?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고통 자체를 막무가내로 회피하려고 하거나, 적은 고통으로 많은 즐거움을 느끼려고만 합니다. 어린 시절 과잉보호를 받은 경우라면 고통에 대한 적응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 있겠죠. 아니면 선생님의 경우처럼 어린 시절 물놀이 사고를 당할 뻔 했던 기억 때문에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경우도 있겠고, 원치 않은 고통을 강요받은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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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조기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영어 학습을, 선행학습이라는 이유로 수학 공부를, 아이의 재능을 속단한 부모에게서 피아노 교습을 강요받은 아이들의 처지에서 외국어 학습, 수학 공부, 악기 배우기는 예견된 고통에 불과할 겁니다. 또 사회적으로 정직한 노동에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들일하며 웃음짓는 농부의 모습은 더 이상 볼 수 없겠지요.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고통에 대한 부적응 때문이든, 막연한 두려움이나 낯섦 때문이든, 흔히들 ‘트라우마’라 부르는 좋지 않는 기억 때문이든, 고통 회피의 이유 자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은 오롯이 우리 개개인이 이유를 불문하고 짊어져야 할 ‘피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회피할 수 있는 도덕적 명령이나 의무가 아니라는 거죠.

누구나 고통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니 언뜻 슬픈 일처럼 생각되지만 인간에겐 다행히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통 자체를 회피할 수는 없지만 ‘어떤 고통’을 받아들일지를 선택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 고통 자체를 회피한다면 삶의 중요한, 사실상 유일한 의미일 수도 있는 성취감, 보람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인 ‘보람’이 크고 작은 고통의 연속된 과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인정하는 순간, 고통을 마주하는 선택이 결국 행복의 선택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요즘 W가 보여주는 모습에서 ‘보람거리(?)’를 발견합니다. 이따금 W의 얼굴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맞닥뜨렸을 때의 당황, 기대 이하의 결과를 받아들었을 때의 당혹은 읽을 수 있으나 예전에 가끔 엿보였던 두려움이나 무기력의 표정은 전혀 아닙니다. W가 그만큼 성장했다는 뜻이겠지요.

이제 선생님은 W가 앎의 차원으로 들어서기를 기대합니다. 나의 눈앞에 놓여 있는 고통과 보람의 짝들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할지를 대신 결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고통과 보람의 실체가 어떤 것일지 맛볼 기회를 함께 나눌 수는 있습니다. 선생님은 W가 이제 생각의 문을 더욱 활짝 열고 마음의 결을 단단히 다잡고 적극적으로 도전해서 그 달콤 쌉싸름한 기회를 마음껏 즐기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우리는 깨달았네요. 스피노자가 말한 코나투스가 영어로는 endeavor, 우리말로는 힘씀, 노력이라는 뜻인 이유를 …. 우리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힘쓰고 노력해야 한다’, ‘고통을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이치가 담긴 말이었어요. 물론! 쉽지 않겠죠. 쉽지 않은 만큼 보람도 클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우리 모두 힘을 낼 뿐…. 함께 힘내서 고통은 절반으로 나누고 보람은 두 배로 늘립시다. 그래서 ‘나만’이 아닌 ‘우리들’이, ‘공동체’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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