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요즈음 정말 졸라리 덥다. 나는 왠만하면 잘 참는 편인데 절라가 아니라 졸라다. 이럴 때는 정말 졸라 시원한데 퐁당 빠져들고 싶다. 냉장고에 정말 몸을 쑤셔 넣고 싶다. 어둠속의 유희하는@jamieinthedark 시크한 숙녀?는 자기만의 더위 이기는 방법으로 욕조에 계속 담갔다 나왔다갔다리 하루를 몽주리 지낸다고 한다. 그것도 괜찮은 방법인거 같다. 그러나 구챠니즘의 화신인 나는 그것마져도 구챤타. 나는 팬티만 입고 그냥 견디고 있다. 그리고 주문을 외운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졸라리 변해라 시바)
02
어느 순간부터 시바가 내 포스팅에 감초처럼 따라 붙어버렸다. 이게 보는 사람은 거슬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글쓰는데 있어서 윤활류 역할을 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너무 자주하면 식상해질 수도 있고 나의 포스팅 트레이딩 마크가 될수도 있겠다싶다. 그래서 어쩌면 시바 피터라는 별명이 붙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사실 의도가 있다. 시바하면 떠오르는 것이 시바ㄹ이라는 속어일수도 있겠지만 다중 함의를 갖고 있다. 그것부터 먼저 정리하고자 한다.
03
Shiva, Lord of the dance
먼저, 힌두교의 시바Shiva신이다. 파괴의 신이라고 말한다. 생명현상이란 발생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이다. 이 생명현상의 한축인 소멸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시바신이다. 생각해볼 문제이다. 만약에 발생만 있다거나 소멸만 있다면 우리가 도대체 인식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변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생성과 소멸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이다. 발생은 이전 발생의 소멸이 있기에 생성이라는 새로움을 발생이라 이름지울 수 있는 것이고 소멸이라는 것도 소멸의 소멸이 있고 이를 대신하는 새로운 발생이 자리 잡아야 비로소 소멸이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소멸의 발생이 바로 소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발생과 소멸은 무한 반복 되는 것이고 그것을 이름하여 변화라고 부르는 것이다. 시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소멸은 나쁜 것이고 발생은 새로운 것/좋은 것이라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삶이라는 것 자체가 변화라는 과정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춤추는 시바라고 강조한다. 춤을 춘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즐기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고 지혜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윤회라는 사상이 비집고 들어 오는 것이다.
04
그리고, 어느새 우리 인간종자들의 가장 친근한 동반자가 되어버린 동물 중의 하나인 견공, 그리고 그중 하나의 종자 시바가 있다. 시바, 일본의 토착견이라고 한다. 감각이 예민하고 굉장히 기민하고 충성스럽다고 한다.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은 바로 변화를 잘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변화를 잘 관찰한다면 삶의 지혜를 그만큼 빨리 얻어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동아시아 삼국(한국/중국/일본)은 지성인들의 인생 철학서인 역경易經/i-ching을 변화에 관한 통찰을 제시한 경전이라고 불렀고 역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 물론, 지금은 이것이 단순히 점쟁이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오해되고는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두가 그렇듯이 이것을 이용하는 유저의 문제이지 본질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동영상에 자주올라오는 시바견 테마 동영상들은 보는 사람들을 유쾌하게 한다. 물론 시바견만 그런 것은 아니지겠지만,
살인미소 시바
https://steemitimages.com/0x0/https://gateway.ipfs.io/ipfs/QmRkdcfuDwN7Kf19PHsqs7DDYFTxGmHwTxsDeDdqaXsaR9
집에 안간다! 이눔아... 이거 놔라! 닝겐! by @kiwifi
아무리 삶이 고통스럽다고
하더라도 미소 짓자 시바
(으아 졸라리 덥다. 시바)
ps. @kiwifi님의 댓글에서 시바 피규어를 소개한 포스팅이 있습니다. 개구엽습니다. 그래서 요기에 샤샤샥! 그림과 함께 링크 걸어두었습니다. (드가보3)
따라서, 시바 피터의 시바 남용은 이렇게 정리 되었다. 시바,
- 변화를 몸소 받아들인다, 시바
- 기왕 받아들인 인생, 시바견의 미소같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검은 머리 파뿌리되도록
미소로다가, 시바
시발에 대한 추가 첨언: 시발을 시간이 시작(출발할 발發)한다는 의미(時發)라고 주장한다면 미친놈이란 소리를 듣겠지?
이렇게 생각하면 괜찮은 의미일것도 같다. 시바ㄹ
05
10여년 전 회사 다닐 때 운전하다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던 노래가 있었다. 참 좋다고 생각하고 노래 제목을 찾으려고 했으나 알수가 없었다. 그런데 몇 년전 K-POP Star오디션에서 이 노래가 흘러 나오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유레카! 시바! 그 후로 시도때도없이 주구장창 이 노래를 듣고 있다. 나에게는 이 노래가 주문송과 같다. 아마 질릴 때까지 들을 것이다. 정말 지겹게 들어서 이젠 질려버린 노래가 있다. Yesterday, Can’t take my eyes off you이다. 이제는 증말 듣기 싫다. 그러나 이노래는 아직 아니다. 나의 이 노래에 대한 도착적 성향이 언제 까지 갈지 두고 볼 일이다.
Keane – Everybody’s Changing
뮤직비디오의 설정이 기가 막히다. 그룹 멤버 전체가 노래의 흐름따라 바뀌어버린다. 보컬/드러머/키보드 연주자들이 다양한 인물들로 변화된다. 얼마전 배두나 주연의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as, 2012)도 연상이 된다. 윤회사상의 붕어빵이다. 한 사람의 지금 인생에 수많은 인간 군상이 생성되고 소멸되어 흘러왔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거의 인간 군상은 바로 지금의 이 사람이 아니다.
Everybody’s changing
나는 이 뮤비를 통해서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을 이해한다. 아마도 이 그룹 멤버들은 불교신자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이들의 노래들을 들어보니 다소 철학적인 것도 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1)변화(무상)에 의해서 건립된 세계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영원한 것/항상함이 있다는 것은 변화가 없다는 것인데, 변화가 없다면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존재라는 것의 의미를 변화지 않는 고정된 실체로 정의한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변화를 떠나서 결코 가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홀로 존재하는 신이 있다라고 하는 믿음?도 이미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인식의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인식이 먼저일까? 신이 먼저일까? 나의 인식을 떠나서는 신이라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관계를 떠난 신이란 존재할 수도 인식되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어찌 보면 변화라고 불려질 수 있는 것도 같다. 이것은 불교와 타종교(신을 믿는 종교) 논사들 사이에서 자주 논쟁되어졌던 신의 존재에 대한 비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변화 속에서 계속 돌고 도는 윤회라는 생명의 수레바퀴wheel of life안에서 갖혀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변화하기 때문에 2) 괴롭고(고통), 변화하기 때문에 3) 고정불변한 실체로서 존재하는 나라고하는 것은 없는 것(무아)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를 삼법인, 모든법(현상)은 무상無常하고, 모든 것이 괴로움苦이고, 모든 법(현상)이 무아無我라고 세가지 진리를 설파해왔다.
나의 포스팅 대부분은 기승전-삼법인으로 쓰여져 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주제가 다 뽀록났다)
만법귀삼법인萬法歸三法印이다
You say you wander your own land But when I think about it I don't see how you can You're aching, you're breaking And I can see the pain in your eyes Says everybody's changing And I don't know why
어차피 모든 것이 변화한다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자. 원래 그런 것이다. 변화하기 때문에 괴롭고, 무너지기breaking 때문에 괴롭고pain, 무너지기 때문에 아픈 것aching이다. 늙고 병들고 헤어지고 그리고 행복한 순간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고통을 고통으로 보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환상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환상말이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그래서 변화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그 마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Remake Version 1
Keane – Everybody’s Changing – Glasgow 2017(Acoustic)
So little time Try to understand that I'm Trying to make a move just to stay in the game I try to stay awake and remember my name But everybody's changing And I don't feel the same
우리 삶은 사실 길어봐야 100년이다. 우주의 역사에 비하면 먼지의 때만도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서 영위하는 시간은 우주의 시간축에서 점을 찍지도 못할 만큼의 무한소無限少/little time의 시간이다. 그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삶 그자체를 예전과 같은 고통/집착/강박적 삶으로 보지 않고 게임으로 보게 될 것이다. 왜냐면 너무나 짧아서 소중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죽을 시간이 미리 정해져있는 삶이라면 적어도 막돼먹은 인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소중한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고통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즐길 수 있을 것game이다. 매 순간이 사라지고 없어지므로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순간 순간의 삶을 깨어 있어야stay awake 한다. 이러한 순간 순간 관찰하는 찰나의 삶을 수행자들은 알아차림/깨어있음/마음챙김awareness/mindfulness/sati, 정관正觀, 바로 여기Now & Here라고 표현하고 실천적인 삶으로 확인해왔던 것이다. 그렇게만 될수 있다면
I don't feel the same
(그봄은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것은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You're gone from here And soon you will disappear And fading into beautiful light Cause everybody's changing And I don't feel right
우리가 ‘나’라고 표현하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피터라는 ‘나’도 일시적일 뿐이다. 바로 직전 순간의 ‘나’와 다음 순간의 ‘나’도 엄밀하게 본다면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는 순간적으로 소멸disappear하고 새로운 나로 발생되었다. 그렇지만 발생과 소멸의 속도차이가 생기기 때문에 노화라는 이름이 붙여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거시적인 죽음과 탄생, 미시적인 죽음과 탄생을 항상 경험하고 사는 주체인 것이다. 그 변화라는 것의 주체는 무엇일까? 분명히 변화를 보는 주체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나’라고 부를 수 없다. 너무나 빨리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주체를 포착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할 뿐이다. 즉 고정된 존재는 없고 변화하는 상태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것을 바라보고 알아차림할 뿐이다.
티베트에서는 의식이 있는 존재의 상태를 바르도bardo라고 불렀다. 이를 한자말로 중음中陰이라고도 표현한다. 따지고 보면 모든 순간이 바르도/중음이다. 1)지금 깨어있고 숨쉬는 순간, 즉 들숨과 날숨의 반복된 사이도 중음이 있고, 2)잠자는 시간에 꿈을 꾸는 그 시간도 중음이 있고, 3)우리가 죽음의 순간 그리고 다시 태어나는 사이도 중음이있다. 그야말로 바르도/중음은 시간사이의 공간이고 빈틈인 것사이 間/interval이다. 티베트 수련체계에서는 삶과 죽음 모두가 수행의 재료이다. 영원히 계속되는 이 중음의 순간을 그저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과정으로 본다.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일으키는 번뇌탐욕/성냄/어리석음없이 바라보는 것을 연습하는 것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언제나 번뇌를 떨쳐버릴 시간은 충분이 마련되어 있다. 끝도 없이 돌고도는 윤회의 수레바퀴samsara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번뇌없는 알아차림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해탈인 것이다.
The Wheel of Life of the Bon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都是心身樂處
몸과 마음 곳 곳 어디나 다 놀이터구나
@peterchung
이것을 매순간 연습해야 한다. 단, 번뇌를 소멸시키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이, 즐겁게 그리고 덤덤하게,
Try to understand that I'm Trying to make a move just to stay in the game
ps. 윤회가 믿기 어렵고 정신나간 사람의 주장이라면 [카르마와 창조성] 들어가며 (부제: 운명학에 대한 견해/운명은 宿命일뿐인가? 改運인가?)을 읽어봐 주세요.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름대로 정성들여서 썼습니다.
Remake Version 2
21세기 時景 일반
희은 백구를 노래하다 / 나의 강아지 뭉치를 그리워하며
Starship이 STIM City 선동가를 제안하다 / Nothing’s Gonna Stop Us Now
해철이 해철에게 편지를 쓰다 그것도 두번씩이나/ Letter to Myself
연우와 폴 바람을 노래하다 /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중년 남자 송창식 선운사(禪雲寺)의 상징을 노래하다/부제: [동백2(冬栢)] 스티미안 자연사(自然史) 박물관
송창식옹 헛바람 넣지 마세요/부제 : 고래사냥에 대한 반박/부부제(뉴비를 위한 가이드): 스티미안의 꿈3
에피톤 프로젝트 제주도의 상징을 노래하다/ 유채꽃
날아라 슈퍼보드 아이들에게 주문을 가르치다(치키치키차캬차캬초코초코쵸)/주문을 훈민정음 제자원리로 해석하다
광석이 법정을 노래하다 / 맑고 향기롭게(淸香)
Pink Floyd가 마인드 와칭(Sati)을 노래하다 (부제: Wish you were here /현실을 바로보라)
21세기 時景 사랑자취(愛痕迹)
현정은 추억과 상처에 관한 정신심리학자이다 / (부제 :사랑은 봄비처럼 이별은 겨울비처럼(임현정)
듀스(DEUX)가 떠나간 여인에게 찌질한 저주를 퍼붓다 [떠나버려(초라하다)]
젋은 날의 사랑(외사랑 그리고 짝사랑)
모래위의 발자취 (부제: 미련만 남아서)
소라가 바람을 노래하다 (부제: 나에게서 무너지는 시간, 바람과 같이)
시경(詩經)도 대중가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