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 욕망의 경제] ‘도둑맞은 편지’, 미제스, 라캉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 2 – 미제스의 공리를 뒤흔들다

미제스 선생님, 헤르메스입니다. 첫 번째 편지는 잘 읽으셨는지요. 두 번째 편지는 생각보다 늦었습니다. 어제는 공사가 다망했거든요. ‘공’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전에는 입학식 행사가 있었고 ‘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후에 야구 경기가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공사가 ‘다망’했을 뿐, ‘다 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입학식 행사는 본 행사인 입학식에서 각 가정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식후 파티까지 즐겁고 들뜬 분위기에서 잘 마쳤고, 야구 경기는 6대 3으로 뒤지던 마지막 회 투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동점 2루타, 그리고 끝내기 안타로 역전승을 거두었으니까요.

저는 뭘 했냐구요? 5번 1루수로 나가서 비록 1타수 무안타지만 볼넷 두 개로 나름대로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특히 투아웃 동점 2루타 당시, 1루 주자로 홈까지 달려 동점을 만들었으니 꽤나 큰 기여를 한 셈이죠? 어쨌든 어제 있었던 두 이벤트에서 저는 저의 선택에 따라 행동해서 확실히 주관적 만족을 얻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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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폰 미제스 (http://mercadopopular.org)

여하튼, 이제 부족한 저의 두 번째 편지로 이야기를 이어가야 할 텐데요. 먼저 첫 번째 편지를 다시 읽으시는 수고를 덜어드릴 겸 <도둑맞은 편지>의 줄거리를 다시 옮겨드립니다.


사립탐정 뒤팽에게 경찰국장 G가 찾아옵니다. 왕비께서 ‘도둑맞은 편지’를 찾고 있는데 도움을 달라는 것이죠. 사건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왕비가 내실에서 S공작이 보낸 극히 사적인 내용의 담긴 편지를 읽고 있을 때 왕과 장관 D가 들어옵니다. 당황한 왕비의 표정을 보고 편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D는 마침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다른 편지와 왕비의 편지를 바꿔치기합니다. 왕비는 모습을 빤히 보면서도 왕이 편지의 내용에 대해 의심할까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편지를 손에 넣은 장관은 이를 이용해 맘껏 권력을 휘두르게 되지요.
편지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받은 경찰국장 G는 여섯 달 동안 D의 저택를 비롯한 모든 장소를 샅샅이 뒤지지만 편지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G의 부탁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뒤팽은 편지를 찾아 넘겨줍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결과부터 미리 말씀드리면 그 편지는 장관 D의 거실 벽난로 옆에 놓여 있던 편지꽂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답니다. ( ‘도둑맞은 편지’, 미제스, 라캉 그리고 오스트리아 학파 1 – 가치의 전복에서 욕망의 전복으로)

다음으로, 미제스 선생님이 제시하신 공리, ‘모든 인간(개인)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인식된 인과성) 행동한다’에 맞게 이 소설에서 세 명의 주요 캐릭터가 하는 행동을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 왕비(개인)는 편지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기(인과성)를 원해서(목적) 경찰국장에게 편지의 회수를 요청한다.

  • D장관은 왕비에 대한, 나아가 정부 전체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강화(인과성)하기 위해서(목적) 편지를 훔치져 소유한다.

  • G국장은 왕비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인과성) 위해서(목적) 편지를 찾으려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선생님의 공리는 한 톨의 모순 없이 대단히 깔끔하게 적용되는 듯합니다. 공리란 보편법칙, 다시 말해 모든 개별에 예외없이 적용될 수 있어야하니, 선생님의 아이디어는 가히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을 듯한데요. 그런데 어라?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한 정신분석학자가 조금은 다른, 아니, 정반대되는 듯한 이야기를 하네요.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 분의 이야기를 미제스 선생님 식으로 다시 옮기면 이렇게 되겠죠? ‘내 행동의 목적은 타자의 목적이다.’ 더 쉽게 옮기면 ‘내가 원하는 것은 타인이 원하는 것이다.’ 알 듯 모를 듯 하시죠? 저도 처음 이 분의 주장을 접했을 땐 그랬습니다.

어이쿠! 내가 원하는 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건데, 이걸 수학적 공식으로 나타내면 ‘W=~W’가 되는데? 아니, ‘A=A’야말로 모든 진리의 출발점이라 말했던 고대의 파르메니데스나 근대의 피히테를 딱히 거명하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렇게 이해할 수는 있겠죠. “우리가 ‘지금’ 원하는 것은 우리가 ‘진짜’ 원하는 게 아니야”라고... 이렇게 말하고 보니, 몇 년 전 세상을 떠난(ㅠㅠ) 마왕의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좀 뜬금없지만 지루함도 달랠 겸, 노래나 한 곡?

크래쉬가 메탈 버전으로 리메이크한 마왕의 곡입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신해철 작곡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크래쉬 리메이크). 몇 해 전 마왕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강아무개 의사의 행동에 숨은 목적, 그의 주관적 욕망은 무엇이었을까요?

스트레스가 좀 풀리시나요? 역시 메탈은 진리입니다.ㅎㅎ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가겠습니다. ‘지금 네가 원하는 것은 진짜 네가 원하는 게 아니야’라고 ‘지금’과 ‘진짜’라는 부사를 슬쩍 집어넣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중요한 교훈을 담을 수도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부당한 일입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사실 진술’이지만 ‘진짜 원하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것’ 등의 진술은 가치판단이 함축될 여지를 주기 때문입니다. 가치판단은 논리에 끼여들 수 없는 일, ‘공리에서 출발한 수학적 연역’ 즉 선생님이 선택하신 방식에선 ‘반칙’에 해당하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반칙을 하지 않으면서, 즉 선생님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앞서 말한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아이디어를 이해할 방법은 없는가? 한 가지 시도로서 도둑맞은 편지의 세 인물이 하는 행동을 미제스 선생님 식으로 (인간-목적-인과성-행동으로 이루어진 도식에 맞게)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 왕비는 왕으로부터 계속 사랑받거나 왕비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 경찰국장에게 편지의 회수를 요청합니다.

  • D장관은 편지의 소유자로서 왕비로부터 인정받고 나아가 권력의 소유자로서 정부 관료들과 백성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편지를 훔쳐서 소유합니다.

  • G국장은 경찰국장으로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왕비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편지를 찾으려 합니다.


여기서 잠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도둑맞은 편지> 어느 곳에서도 정작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어느 등장인물도 편지의 내용을 알지는 못합니다. 심지어 왕비마저도 그 내용을 알고 있는지 불분명합니다. 어디까지 읽다가 도둑을 맞았는지가 불분명하거든요.

덕분에 소설 내부의 등장인물 뿐 아니라 소설 바깥에 놓인 독자들 또한 편지의 내용을 마음껏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에 따라 이야기의 성격 또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죠. 추리소설의 형식 속에 숨겨진 불륜(비극적 사랑?), 국정농단(혁명극?), 권력암투(스릴러?) 등등으로...^^

이 소설은 편지의 내용, 심지어 뒤팽을 제외한 등장인물의 이름까지도 기호로 처리하고 사건의 핵심 주체(범인인 D장관)을 제외한 나머지 등장인물의 성격에 대한 서술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비슷한 내용이나 줄거리의 다른 작품들과 차별성을 갖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마법사들과 철학자들이 열광하는 것도 알고 보면 소설 안팎의 ‘비어 있음’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오호라! 이 부분에서는 미제스 선생님, 카를 멩거, 또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공통적인 아이디어와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화폐는, 재화는, ‘욕망의 대상’은 그 어떤 내재적 가치도 갖지 않는다! 텅 비어있다!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주체다! 대상을 소유하는 목적은 주체의 만족이다! 한 대상을 소유하기 위해 다른 대상을 포기하는 목적도 주체의 만족이다! 중요한 것은 효용이다! 교환이다! 가치의 전복!

가치를 대상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여러분들의 전복적 시도는 매우 적절했고 성공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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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연역, 논리라는 창문.... 욕망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좁고 꽁꽁 언... 어쩌면 우리의 언어조차도...? (http://wallpaperswide.com)

하지만 수학적 연역이 제시한 정답에 만족 못하는 짓궂은 헤르메스의 시선은 (예상하셨겠지만^^) 선생님의 공리, 특히 인간/개인/주체(주관)/자아로 흐릅니다.

이제 대상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성질(사용가치=용도) 또는 상대적 성질(교환가치=가격)를 논리적으로 삭제하는 데 성공했으니, 주체는 대상으로부터 무한한 자유를 얻어야 마땅합니다. 선생님이 인간행동, 나아가 경제 현상의 예측 가능성에 부정적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 ‘자유’ 때문 아니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루소의 말대로 인간은 오히려 도처에서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1인칭으로 설명하자면 ‘나=주체’이며 ‘나를 제외한 모든 것=대상’이니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는 곧 ‘절대적 자유’이어야 마땅하건만... 왜 우리는 이렇게 자유롭지 않을까? 현실은 왜 이렇게 논리적이지 않을까? 논리적으로 당연한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은 부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현실에서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은 추방되고 배제되어야 하지 않을까?

잠깐! 논리에 맞지 않는 현실을 공격하거나 이상의 세계, 피안으로 도피하기 전에, 우리... 우리 논리에 빠진 것을 찾아보려는 노력이 앞서야 하지 않을까요? 미제스 선생님이시라면 도둑맞은 편지가 우리에게 준 교훈을 상기해보시면 얼마간 감을 잡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우리 논리에 빠져있는 것. 그것은 바로 주체를 둘러싼 ‘관계’, 자아를 둘러싼 ‘타자의 존재’ 그리고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가 맺고 있는 관계가 그것입니다.

왕비는 왕에게서 사랑받기 위해서, 아내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해서, D장관은 권력자로서의 지위을 인정받기 위해서, G국장은 경찰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 편지를 손에 넣고자 합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친구들로부터 인정받거나, 부모님의 기대를 실현하거나, 남들이 선망하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이고 좋은 대학에 가려는 것은 돈, 권력, 명예 등 다양한 기준에서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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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끄 라캉 (1901-1981)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 헤르메스는 우리 집 여왕님을 사랑합니다. 나라는 주체가 여왕님을 사랑하는 것이죠. 하지만 내가 여왕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여왕이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고 기대하고 사랑하리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과 기대와 믿음은 미제스 선생님의 말씀대로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왕님에 대한 저의 사랑(목적, 욕망)에 비추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해왔던, 그리고 앞으로 하게 될 저의 모든 행위를 잘 살펴보면, 그것이 저의 행위, 저의 만족을 위한 행위이자, 여왕님이 저에게 원하고 기대하는 행위, 여왕님이 저에게 원하고 기대하리라 제가 원하고 기대하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가 여왕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서 어떤 생일 선물을 할지 선택하는 나의 행위는 나의 주관적 만족에 따른 행위이자, 여왕님의 주관적 만족을 위한 행위이자, 여왕님의 주관적 만족을 원하는 나의 주관적 만족을 위한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주체와 대상, 자아와 타자, 주체과 구조 사이의 경계는 선생님의 공리처럼 그리 명확하지 않습니다.

W=~W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해서, 이것이 수학, 논리학, 나아가 학문 전체의 최고 원리(A=A)에 어긋난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가 원하는 것은 타자가 원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는 진술이 갖는 의미를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설령 라캉의 주장이 틀렸다 해도, 다시 말해 '모든 욕망이 타자의 욕망인 것은 아니라고' 해도, 그런 욕망과 그에 따른 행위가 저의 ‘생일 선물’처럼 적어도 하나는 존재하기에, 선생님이 제시하신 공리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공리’는 보편적 법칙이기에 강력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단 하나의 반례만으로도 허물어질 만큼 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역시, 사랑은 논리가 아니었습니다.^^ 욕망에 관한 한, 그에 따르는 인간의 행위에 관한 한, 수학적 연역, 논리학 어쩌면 우리의 언어 자체는 그리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하는 듯합니다. ‘자유’를 중심으로 인간 행위의 예측 불가능성을 말씀하셨던 미제스 선생님이시기에 연구 방법으로서 ‘수학적 연역’을 선택하신 건 너무나 아쉽습니다. 그러한 선택에 반영된 선생님의 욕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휴... 선생님, 오늘 저의 두 번째 편지는 여기서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여왕님을 모시러 가야할 시간이거든요. 공처가냐구요?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저 스스로 ‘여왕님의 노예’ 혹은 3류 멜로 식으로 ‘욕망의 노예’라 비하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부자가 아닌지라 자동차가 한 대 밖에 없고, 여왕님의 악기는 덩치가 크고, 제가 가지 않으면 여왕님은 큰 덩치의 악기 때문에 고생을 할 테고, 여왕님 스스로가 그런 고생을 원하지 않는 한, 저는 저희 집 앞 주차장에 있는 유일한 차를 몰고 여왕님을 모시러 ‘자발적으로’ 나갈 것입니다.

노예로 치자면 ‘자발적인 노예’고, 자유인으로 치자면 ‘노예 되기를 선택한 자유인’ 쯤 되겠네요. 선생님, 이거 아세요? ‘free’라는 영어 단어가 원래 ‘사랑’이라는 뜻이었다는 걸... 다음 편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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