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여행기를 적으려고 했으나 밀려버렸다. 잦은 숙소이동으로 하루를 꼬박 날리는 경우가 많아서 누적된 신체적 피곤함이 있었고 이후의 숙소 특히, 수도원방에서는 인터넷이 안됨에서는 글을 쓸 시간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행한 곳 대부분이 외진 곳이라 교통편이 드물고 이동 중에 변수가 많았다. 여행전 자동차 렌탈을 고려했으나 극저품질 공간 지각력의 길치라서 포기했다. 그러나 막상 불편을 겪으니 그러한 결정을 엄청 후회하게 되었다. 더구나 요즈음은 구글 신에게 물어보면 다소 멍청하고 악의적한번은 꼬불꼬불 19분, 1.5km. 이렇게 안내한다. 어째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이걸 믿고 비맞으며 땀을 삐질삐질 옷은 흥건히 젖으면서 풀숲까지 휘져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개개개구글×××!, 쌍욕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한다. 위치를 20m 절벽 아래로 안내해서, 나중에 살펴보니 잘 닦여진 포장된 길로 4분이면 끝이긴 하나 해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스팀시티 유랑단 덕분에 라 베르나 수도원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헤어진 후, 다시 숙소이동이 시작되자 마음이 우울해졌다. 최신형 그랜져타다가 리어카 끄는 기분으로 다운그레이드 되다보니 여행이 더욱 지쳤다. 내가 이럴려고… 돈쳐발라…,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것보다 부자가 갑자기 가난해지는 정신적 박탈감이 더 심화됨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여행은 여러모로 삶의 연륜을 내 의식에 아롱지게 새겨놓는다.
라 베르나 수도원을 나서며 아시시로 가기위한 첫번째 마을버스 정류장으로 내려갈때 수녀님께서 잘가라고 스마일 미소짓는다. 나도 챠오!
여기까지는 좋았다.
중간 경유지 비비엔나행 버스 정류장에서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3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날은 덥고 배는 고픈데 주위에 먹을 곳도 없다. 다시 수도원으로 올라가려면 최악이다. 돌바닥에 꼬불꼬불 급경사로 난감하다. 하산하는데 여행 가방이 지맘대로 달달달, 애먹었다. 짐은 많고 체력은 고갈! 라 베르나 수도원에서 잘못된 버스 정보를 알려주었다.
지금은 방학이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배차 간격이 길어진다고 한다. 이를 인터넷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치밀함은 나한테 없다. 더군다나 시골 마을버스 운행 계획이 올라와 있기나 할까? 그냥 안내 표지판의 정보를 그대로 믿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럴때는 라라(@roundyround) 지니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스마트폰 안테나도 안터진다. 원래 고난은 복리로 작용 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인가 보다. 더욱이 이태리 사람들은 업데이트를 재빠르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나 느긋하여 나같은 굼벵이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사실 지나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데 막상 상황이 닥치면 힘들고 짜증이 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마침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예정했던 여행지에 무탈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배낭영성
라베르나(위대한 영혼의 물화)와 관련된 글 일부와 수도원의 풍경을 남겨둡니다.
라 베르나 수도원은 종교인이 아니어도 한번즈음 찾아가 보길 권하고 싶다. 라 베르나 수도원뿐아니라 앞으로 포스팅할 수비아코 수도원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 포스팅했던 만레사 동굴도, 아니 위대한 영혼의 수행전통이 오래도록 계승되는 곳이 있다면 외국이 아니더라도 혹은 종교를 불문하고 어디든지 찾아가서 며칠씩 머물러 보는 것이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사에 지쳐있는 우리에게 정신적 에너지를 재충전시킬 기회를 제공해줄 것 같다. 우선 정신적 평온을 이끌도록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문득 이러한 생각도 든다. 왜 유럽의 수도원들은 적게는 100년 혹은 길게는 1,000년 이상 전통이 된 터전을 잘 가꾸고 보존하고 있을까? 옛날 선배 수도자들이 닦던 그 터에서 후배 수도자들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 우리가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문화 보존에 대한 인식이 빈약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서양과 우리의 건축 양식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같다. 서양은 벽돌식 건축이기 때문에 반영구적이었고 그에 비해 동양은 목조건축으로 내구성이 약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동쪽은 오행상 목(木)의 성질이 우세하여 발생(봄의 계절적 특성, 밖으로 퍼져나감, 따라서 부서지기 쉬움)에 역점을 두어 발전하였고 서쪽은 금(金)의 성질이 우세하여 수렴(가을의 계절적 특성, 내부로 거두어들임, 따라서 단단함)적 성격이 많아 건축 양식에서 이러한 차이가 난 것 같다. 번뇌로 가득한 인간사에서 잦은 전쟁은 피할 수 없었을 테고 여기에 덧붙여진 자연 재난들에도 불구하고 동양의 목조 건물보다 서양의 석조 건물은 오래도록 뼈대를 보존하며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외관이 아니라 내적인 정신문화의 계승이다. 우리나라도 건물의 외관은 그 시대와 다르지만, 전통을 계승하면서 수행문화를 면면히 이어나가고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이러한 전통을 찾아서 여행을 해보고 싶다.
수도원 내부의 통로를 걷고 있다. 수백년전의 수도사들도 이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수도원 내부 마당에 우물이 있다. 수세기에 걸쳐 건물이 증축이 되어 미로같다.
라 베르나(La Verna)는 아페니노 산맥의 한 부분인 고립된 하나의 둔덕이다. 최고 높이는 1,283m에 이르나 성지는 해발 1,128m이다. 그 일단은 작은 계곡을 중심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들과 드러난 바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바위들 가운데 일부는 깊은 균열을 보이고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오랜 세기 전에 있었던 강한 지진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지와 수도원은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 두세 개의 장소들을 중심으로 여러 세기 걸쳐 확장되어진 불규칙한 형태의 건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발자취를 찾아서
서양의 수도원은 대개 한 사람의 위대한 영혼이 수행하던 터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정신을 이어가면서 확장된다. 이곳 라 베르나 수도원도 재력과 권력을 겸비한 후원자의 전적인 지원으로 프란치스코 성인이 머물렀던 터전이 마련된 뒤 12세기 이후부터 21세기인 지금까지 계속 물질적, 정신적 진화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고 있다. 특히 여기 수도원의 특성은 그냥 척박한 동굴 위에 건물로 세워진 것이 아니다. 동굴 주변에 자연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수행자에게 자연의 경이로움과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도록 무한한 영감을 내려주는 것 같다. 동굴로만 이루어진 수행 터전은 무정하고 가부장적으로 내리꽂는 강림그분이 왔어요. 띠로리~의 남성이라면 라베르나의 동굴 수행 터전은 경이로운 자연이 동굴 바로 옆에 펼쳐져 있어 어머니의 품과 같이 수평적이고 포근하다. 권위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위엄에 대한 경건함보다는 따스하고 편안함으로부터 일어나는 영감이라고 표현할까? 그냥 동굴은 메마르고 무미無味乾燥하다. 행동 철학적 접근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있음有’과 ‘없음無’이다.
이곳 프란치스코 성인의 수행 터전은 두가지(숲과 어우러진 동굴)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기적 또한 야생 동물(새와 늑대 등)과 함께한 일화들이 많다. 그냥 동굴에서 수행자는 내면의 빛으로 파생된 환시를 체험하는 경우가 많다. ‘나’를 둘러싼 ‘타자’가 무정한 동굴뿐이기 때문이다. 소통 가능한 생명체를 만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러한 수행 터전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수행자의 개인적 기질이 그러한 장소와의 인연을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기도문을 좋아한다. 종교적인 색채를 떠나서 이 기도문의 내용은 철저하게 ‘나의 이기심’을 버린다. ‘나’가 무엇을 바란다면 바라는 것을 먼저 상대에게 해주어야 한다는 다짐뿐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우주의 카르마 법칙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실천하신 ‘무아(無我)’의 계산주의자였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첫날 라 베르나 수도원 밤거리를 빛에 의지하여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9시 30분 이후에 모든 수도원 입구가 봉쇄된다고 하였던 것 같다. 어둠이 짙어져서 들어가려고 했으나 문이 닫혀있어 숙소로 들어가는 방법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겁이 나긴 했지만, 어딘가 문이 있겠지 생각하고 수도원 밤거리를 즐겼다. 인스타그램
중세의 수도원 분위기를 적절하게 느끼면서 프란치스코 성인의 온기가 남아있는 수행 터전에서 내가 느낀 감상을 사진과 함께 정리하고자 한다. 라베르나 수도원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예수의 다섯 가지 십자가 상처 흔적의 기적과 관련이 있다.
불교에 삼신(법신, 보신, 화신)三身(法身, 報身, 化身)이란 개념이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부처님의 세 가지 모습이다. 법신(法身)은 깨달음의 원형, 보신(報身)은 깨달음의 에너지, 화신(化身)은 깨달음의 객관적인 모습이다. 물질세계에 길들어져 있는 우리는 기껏해야 물질화된 화신(化身)의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음의 모습에 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를 깨달음의 화신(化身)이라고 한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인간이 죽음의 과정에서 보신(報身/에너지체)을 경험한다고 한다. 육체가 소멸되는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의식의 아주 청정한 영역인 보신(報身)의 경계까지 체험하지만 복잡하게 얽혀 왔던 번뇌의 사슬 때문에 이 청정한 경계인 보신(報身)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왔던 수많은 생애 업의 힘습기(習氣)에 의해 블랙홀처럼 빨려들어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겪는다고 한다. 이를 부연하자면, 인간의 의식 기저에는 맑고 깨끗한 청정한 빛심광명(心光明)의 바탕이 있는데 죽음의 과정을 통해서 이를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오염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깨끗한 바탕이었음을 전제로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의식 본바탕은 한없이 깨끗한 청정한 마음인 보신(報身/에너지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오랜 생애 동안 쌓아온 번뇌의 습기(업) 때문에 ‘무명(無明)’의 구름에 가려져 있을 뿐이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재생되는 것인데, 재생의 과정은 우선 비어있어야만 다시 생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경계의 보신(비어있음/깨끗함/공성)을 경험한 뒤, 죽은 사람의 이전 생애 습기(업)들이 원재료가 되어 그 조건에 맞게 다시 태어남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 수행자들은 지속적인 명상을 통해서 이러한 밝고 깨끗한 에너지인 보신(報身)을 체험하려 노력하고 이를 끝까지 놓지 않아 영원한 청정 법신(法身)의 경계까지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참고로 불교에서 정의하는 깨달음이란 번뇌(탐욕, 성냄, 어리석음)의 완전한 소멸이다. 완전한 소멸이란 무의식에 잠재된 번뇌의 습기 종자까지도 제거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표층의식의 번뇌조차 소멸시키지 못하여 이렇게 허우적거리고 있다. 이렇게 번뇌를 완전히 소멸하면 깨닫지 못한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화신(化身)이 될 수 있다. 대승 보살은 중생을 모두 해탈의 경계로 인도하기 위해 부처님(깨달음)이 되는 것마저 포기하고 윤회의 바다에 직접 뛰어들어가서 번뇌와 기꺼이 싸우는 전사들이다. 부처님이 되는 것마저 포기할 수 있는 용기의 근원은 무엇일까? 보살이 바로 부처(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장황하게 삼신에 대하여 설명하는 이유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의 기적에 관하여 불교적 시각으로 설명을 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합리성과 실증과학에 익숙한 우리는 기적에 대하여 단순히 신화적인 사건으로 치부하거나 신비라는 이름으로 맹신 또는 의심한다. 그러나 의식을 에너지라고 이해한다면 물질과 정신의 복합체인 인간이 수련이라는 과정을 통해 강인한 정신 에너지를 얻고 물질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를 동양에서는 도를 닦는다고 표현하였고 인도에서는 요가라는 이름으로 표현하였다. 요가는 물질과 정신의 결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결합을 이끄는 원인은 무엇인가? 아마도 에너지일 것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이를 기(氣)라고 표현하였다. 이 에너지를 정신 에너지를 통해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면 물질 에너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집을 짓는 것도 정신 에너지(의식)를 통해 물질 에너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오상의 기적도 마찬가지이다. 성인의 강인한 정신 에너지가 당신의 몸에 변형을 초래한 것일 수도 있다. 의식도 에너지이고 물질인 육체도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서양의 수도사들은 끊임없는 ‘하느님과의 현존 연습’을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추구했다. 마치 불교의 수도승들이 깨달음을 목표로 요가 수행을 하였던 것처럼,
파욱 사야도의 12연기 도표/업(業)과 업유/업행(業有/業行)에 관한 설명
물화(物化)란 단어를 찾아보니 마르크스가 만들어낸 용어라고 한다.
대상화(Verge genständlichung)라는 말로도 사용했는데, 대상화란 인간의 노동과 정신 활동이 객관적인 대상으로 구체화 된 것, 즉 대상을 통해 실현된 노동을 말한다. 노동자의 책
객관적인 물질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은 쉽게 가능하지만, 자신의 몸을 스스로 변형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수행을 통해서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요가의 수행체계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하게 서술한 불교의 수행 논서가 ‘유가사지론’과 ‘청정도론’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은 철저하게 ‘나’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수행의 요체이다. 이로써 불교의 ‘무아無我’ 사상과 가톨릭 성인의 기적이 연결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의 기도문처럼,
이곳이 프란치스코 성인의 몸에 오상이 생겨난 곳이다. 처음에는 동굴이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팔로워들은 이곳을 기념하여 경당을 물화(物化)하였다.
성 프란체스코의 첫 독방으로 알려져 있는데 라 베르나에 왔을 때 거의 항상 머물렀던 나무로 된 독방 위에 어느 공작 부인의 명으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쳐 이곳에 건축되었다고 한다. 제대에 끼워진 돌은 그가 사용하던 탁자인데 기도 중에 예수와 그 돌 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갈라진 바위(Sasso Spicco)라는 이름의 이곳은 프란치스코가 기도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던 곳이다. 바위의 갈라진 틈은 예수 그리스도의 옆구리에 난 상처(죽음을 확인하려고 창살로 옆구리를 찌른 곳)를 표상한다. 동굴 주변에 경치가 수려하다. 바위 표면에는 십자가를 새겨놓은 흔적들이 많다. 들어가기 전에 낙서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프란치스코 사후에 다녀간 순례자들이 새겨놓은 것 같다. 길게 800여 년 짧게는 최근까지 몰래 새겨놓은 것도 있을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침대라고 한다. 습하고 냉한 하나의 동굴을 이루고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긴 의자 위에 걸쳐 있는 철 격자 위에 잠시 앉아보았다. 바닥부터 냉기가 계속 차오름이 느껴지는데 여기에서 맨발로 겨울을 지내기도 했다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정신이 육체의 고통을 넘어선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요가에서는 가능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냥 따뜻한 곳에서 과식하지 않고 수행하고 싶다. 동굴 옆에 펼쳐진 초록 경관이 아름답다.
수행자의 삶은 번뇌의 소멸을 목표로 하지만 그 목표로 인해 강박관념에 휩싸여서는 안 된다. 이것이 새로운 굴레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길거리에서 풍만하고 몸매가 이쁜 젊은 여성을 보면 감정이 동한다. 그것이 죄악? 이라고 생각하고 멀리한다고 해서 그 욕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 증폭될 수 있다. 그래서 밀교에서는 그 번뇌(증오나 탐욕)의 에너지를 이용하라고 한다. SEX조차도 감정의 동요 즉, 탐닉함이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雜記] 위험하지만 너무나 자극적인 그리고 너무나 호기심 불러일으키는.... 그이름 탄트라(Tantra) 수행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자신의 몰입과 관찰을 두어 현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에 있어서 ‘나’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면 번뇌의 씨앗을 어디에도 남겨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의 의식에 메어있는 뿌리 깊은 집착심증오도 분노에 대한 애착이다.을 놓아버리는 것이 핵심인데 육신을 가진 인간의 근본은 집착심이 생명의 동인이자 삶을 이루는 수단살기위해서는 적어도 의식주를 갖추어야하고 인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안으로 받아들이는 응집력이 있기때문이므로 이를 집착에너지라고 표현하자이기 때문인데 어떻게 그것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어려운 문제이고 아이러니한 문제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위대한 영혼들은 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계행과 알아차림의 지혜를 가진 수행자는, 잘못된 견해(자아라는 견해)에 메이지 않으며, 모든 감각적 욕망을 다스릴 수 있기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으리라.
그리고 가능하다면, 전 우주를, 그 높은 곳, 그 깊은 곳, 그 넓은 곳 저 끝까지, 일체를 감싸는 사랑의 마음을 키우기를, 미움도 적의도 넘어선 잔잔한 사랑을 일구어 가기를 [자비경과 자비 기도문] 길상사의 성모마리아를 닮은 관음상(觀音象)
감각적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고, 사랑의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잔잔하게 씨앗에 물을 뿌려 자라나듯이, 조급함도 애가타는 바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참된 수행자들의 모습을 보면 솜털같이 부드러운가 보다.
이 수도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축성 기간: 1216년~1218년)이다. 수도사가 가이드를 하기 위해 무리를 앞장서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프란치스코가 동정 마리아의 환시를 본 뒤 성모께 봉헌할 성당을 지어줄 것을 백작에게 청하여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대성당과 수도원이 건립되어 지금의 복잡한 구조가 되었다.
수도원 절벽의 돌계단, 70m 높이의 깎아지른 암벽 부분이다(해발 1,060m). 절벽 위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아름답다. 프란치스코가 절벽 앞을 바라보는데, 마귀가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며 협박하였다고 한다. 절벽 한쪽에 그가 움츠리고 머물렀던 조그마한 동굴이 있다.
새들의 경당이라고 부르는 이곳,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 라 베르나 산에 올라왔을 때 새들이 지저귀며 반겨주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거대한 떡갈나무가 있었는데 그것을 베어버리고 프란치스코를 기념하는 경당을 세웠다고 하는데 아쉽다. 그냥 박물관이 되어버린 기분이다. 새소리가 좋아서 동영상 촬영을 하는데 수도원의 종소리에 새소리가 묻혀버렸다.
수도원에서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산길이 있다. 여기에 프란치스코의 후배 수도자 한분이 수행하던 터전을 기념한 경당이 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수도원을 한눈에 바라볼 수도 있고 고즈넉이 숲길을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은 프란치스코와 관련된 곳만 둘러보고 기념사진 찍고 그냥 떠나간다. 그러나 이 수도원의 매력은 곳곳에 있는 수도터들과 자연이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경관이다.
내가 이곳에서 찍은 사진 중 가장 맘에 드는 사진들, 첫날 수도원 광장에 마련된 십자가 위에 상현달이 떴다. 그리고 이 십자가 맞은편 대성당 안에 모셔져 있는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십자가이다.
나는 언젠가 ‘나’를 사랑해주는 ‘그녀’와 함께 이러한 곳에 다시 찾아올 것이다. ‘나’가 사랑한다고 해서 ‘그녀’가 ‘나’를 사랑해주는 것은 아니니까, 함께하는 사랑도 인연이다. 이번 생애에 그것이 가능할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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