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작은생각] '마초들'에 의해 오염되는 미투 - 나는 진중권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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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인정하자. 무의식이 지배한다. 상처, 트라우마가 지배한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다. "우리를 지배하는 트라우마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나는 진중권이 싫다. 트라우마 때문이다. 그의 언사가 갖는 잔혹성 때문이다. 소름끼치게 싫은, 14년 전의 기억을 소환한다.


"유시민 의원이 피를 토하는 증세. 어쩌면 병이 아닐지도 모르지요. 저 증세가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주기적 현상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합니다. 유시민 의원은 남자인데, 특이하게도 선거 때만 되면 입으로 생리를 합니다. 앞으로 선거가 다가오면 특수 제작된 남성용 생리대를 미리 마련해 놓았다가 입에 차고 다니세요. 빽바지 입는 스탈리스트 의원으로서 그게 보기 싫으면, 목구멍에 삽입하는 탐폰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참 특이한 체질이예요."
(2004년 4월, 진보누리 게시판)


또 한 번, 인정하자. 풍자는 때로 잔혹하다. 아니 잔혹하지 않으면 풍자가 아니다. 풍자는 약자의 무기이기에 잔혹함이란 풍가가 갖추어야 할 미덕일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입' 밖에 없는 약자들이기에 그들이 강자에 가하는 '풍자'의 폭력성은 정당화되어야 한다.

폭력의 기원은 '빠순이'다. 그 시절, 세기말의 '빠순이'는 "연예인들의 뒤를 쫓아다니며 '오빠'를 히스테리컬하게 외쳐대는 여학생"들을 가리키는 비속어였다.

'비이성적 광기'를 난자하는 풍자의 수단으로 '남성 지배', '가부장 지배'의 이중적 희생자인 '여성 청소년'이 소환되고 소비되고 착취 당하는 것이다. 지금 진중권이 취하는 스탠스,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미투'의 정황에서 그가 골라 잡은 '페미니즘'이라는 무기를 생각해보면 꽤나 역설적이다.

그리고 이회창, 노무현이 대회전을 벌인 2002년의 중대 선거에서 마침내 '노빠(=노무현 빠순이/빠돌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노빠'는 '노무현 현상'을 '광기'로 읽은 민주노동당 중심의 '진보'들이 '다수의 힘으로 소수를 압살하려는 노무현 지지자들'에 대항하는 풍자의 무기로 즐겨 사용했고 그 선봉에는 진중권이 있었다.

미학자였던 그가 '언어의 자객' 즉 '논객'으로서 피와 살이 튀는 이 싸움의 선봉에 선 것은 그의 자질 덕분이었다. 그는 '비논리를 마다하지 않는 무자비한 논리'를 갖추고 '동서고금의 예술적 자산들을 섭렵한 미학자만이 가질 수 있는 현란한 조어술'로 기대에 부응했다.

빠순이, 빠돌이, 광신도, 노빠 등의 '기성품'을 차용하는데 만족할 리 없는 미학자 진중권의 미의식은 유빠(유시민 빠돌이/빠순이), 유겐트(나치의 청소년 친위조직. 유시민 지지자들을 비하하는 말로 또 한번 가부장제의 희생자인 '청소년'이 동원된다) 등을 고안해내고 마침내 '입으로 생리하는 남자'에서 절정을 이룬다.

물론 이런 말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모든 책임을 진중권에게 돌리는 건 부당하다. 그러나 미학자인 그가, 지극히 '인간적인' 가치인 아름다움을 다루고 언어학과 기호학에 친숙한 학자로서 이 말이 갖는 '비인간적인' 함의를 모를 리 없는 진중권이 이 같은 언어들을 애용한다는 건 꽤나 기이한 일이다. 그 기이한 느낌은 그로부터 한 달 후 그의 소름끼치는 '자살세' 발언에서 '그로테스크한 충격'으로 변모한다.


자살할 짓 앞으로 하지 않으면 되는 거예요.(웃음) 그걸 민주열사인양 정권의 책임인양 얘기를 하는데, 그건 말도 안되는 거고. 앞으로 자살세를 걷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시체 치우는 것 짜증나잖아요.(웃음) 옛날에 민방위 훈련 가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자살을 할지라도 나라에서 지급한 총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공과 사가 굉장히 분명하잖아요. 자살할 때 조용히 자살하고, 어차피 자살하게 되면 공적인 공권력이 와서 확인을 해야되잖아요. 거기에는 비용이 드는데, 국민세금이거든요. 예컨대 500만원 정도면 될 것 같은데, 500만원을 세금으로 내면서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하는 내용을 제시하는 이런 쿨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것이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04년 5월, 서프라이즈, 지승호와의 인터뷰 중)


강자에 대한 약자의 폭력으로서 풍자가 갖는 잔혹함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마저도 간단히 뭉개버린다. 이러한 진중권의 극단적 잔혹함에는 문학적 선례가 있다.


"별것 아니여 /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버린 일본도란 말이여 /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 처절한 신풍도 별것 아니여 /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 바람이지, 미쳐버린 / 네 죽음은 식민지에 / 주리고 병들어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 역사의 죽음 부르는 /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 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 /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김지하, <아주까리 신풍>


군국주의 부활을 외치며 할복 자살한 일본의 스타일리스트 작가 미시마 유키오를 '풍자'한 김지하의 시다. 이 시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민족주의자일 것이다. 만약, 쾌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시에 '공감'한다면 그것은 피지배민,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 또는 최소한 제국주의에 의한 억압의 기억과 상처를 풍자로 치유받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이 시가 '편안'한가? 연민의 대상이어야 할 '자살'에 대한 풍자, 자살에 대한 비웃음이 주는 불편함은 차치하고라도 '군국주의의 폭력을 그리워하다 자살한 남성 작가'에 대한 풍자의 수단으로 당혹스럽고 곤궁한 위치에 처한 여성,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 서 미친 군가를 제멋대로 불러대는 벌거벗은 여군"이 활용되는 것에 대한, 그 뜬금없음에 대한 불편함은 없는가?

다시 진중권이다. 그의 풍자가 주는 기이함, 불편함, 그로테스크함의 실체는 무엇인가? 강자가 남긴 상처를 '풍자'를 통해 치유받고자 하는 약자의 욕망은 충분히 정당하다. 하지만 진중권의 풍자에는 분명 약자의 욕망으로는 남김없이 설명되지 않는 '잔혹함의 과잉'이 존재한다.

가해자/피해자, 마초/페미, 일베/메갈의 이분법--마초들의 언어--로 오염된 미투의 정황에서 진중원이 다시금 칼을 들었다. 미투의 피해자와 메갈사냥의 희생자들을 수호하는 전사로 변모한 것이다. 철학자가 내놓은 논리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진중권식 귀류법'과 '머리를 액세서리로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라는 예전의 잔혹함에 비하면 귀엽기까지한 수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이제 진중권도 나이가 있는데 설마...하는 낙관적 기대도 있다.

하지만 그의 잔혹한 언어 폭력이 본격화할지 모른다는 징후는 '내가 메갈리안이다', '메갈로 치면 내가 갑이니 싸우려면 나랑 싸우자'는 식의 그의 최근 글에서 드러난다.

작가는 메갈 회원이 아닌데도 그저 '리트윗'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저렇게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황당한 사실이 하나 있다. 내 경우에는 과거에 트위터를 할 때 '리트윗'이나 '좋아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초들 조롱하는 메갈성 글들을 수도 없이 써서 올렸다. 예를 들어 '수백 개가 모여 비비꼬아야 손가락 굵기가 될 실OO들이 자들자들 흥분한다.' 거의 이런 수준의 글들이었다. 그 뿐인가? 어느 일간신문의 칼럼을 통해 아예 '나도 메갈이다' 선언까지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메갈질을 대놓고 하고 다녔는데도 나를 쫓아내겠다고 덤벼드는 기백 있는 '실OO'는 하나도 없었다. 그 많던 실OO들은 다 어디 갔을까?
(오마이뉴스, 나도 메갈인데 나는 왜 무사할까?)


여기서 실OO라고 '모자이크 처리'된 그 말은 '왜소한 남성의 성기'를 가리킨다. 어떤가? 에먼 여성 잡지말고 내가 메갈이니 나랑 싸우자고 '메갈의 언어'를 무기삼아 싸움에 뛰어든 진중권의 면모가... 이름난 논객께서 약자이자 피해자인 여성의 편에 서서 자발적 대리전에 나섰으니 감사할 일, 존경할 만한 일인가? 그의 언사가 갖는 생경한 폭력성은 얼마나 이해할 만한가?

그의 대리 미러링(?), 그의 메갈리안 선언은 그렇다면, '메갈 사냥'에 대한 방어, 성평등을 위한 수단이니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빨갱이 사냥에 대한 방어로 '스탈린주의자 선언'이 정당화될 수 있나? '주사파 선언'이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나?

'강고한 차별적, 억압적 구조'에 대한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그의 풍자가 갖는 잔혹성, 그것이 갖는 정당성을 깡그리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빠, 유빠, 유겐트, 입으로 생리하는 남자, 자살세로 면면히 이어지는 잔혹함의 과잉과 그것이 담고 있는 역설이 온전히 설명되지는 않는다.

다시, 문제는 상처를 대하는 태도이다. 풍자라는 약자의 폭력이 강자의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처럼, 상처입은 자의 분노는 '치유'의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저항과 분노의 목표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억압적, 폭력적 구조의 '반복'이 아니라 '극복'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진중권이 싫다. 그의 노빠, 유빠, 유겐트, 입으로 생리하는 남자, 자살세, 실OO 따위의 언사가 싫다. 이건 취향이 아니라 공포의 차원이다.

미투를 삼류 추리소설의 내러티브로 전락시킨 상업적인 언론, "1억 받고 10억 더"를 외치며 미투를 투전판으로 만든 헛똑똑이 전문가들, '가해자/피해자'의 단순 논리로 피해자 편에 서겠다며 은연중에 여성을 '시혜의 대상', '보호의 대상'으로 가두는 정계/언론계/학계의 '딸 둔 아빠'들... 나는 이 모든 남자들이 싫다. 두렵다.

그 모든 '진중권 류'들이 싫고 두려운 것은 '벌거벗은 갈보, 벌거벗은 여군'이 저항적 풍자의 언어로 정당화되었던 70년대의 미의식이 불편하고, 기괴하고, 혐오스럽고, 공포스러운 것과 같은 이유다. 그리고 그 강도는 그 기괴한 시대를 함께 한 '위대한 시인' 고은의 엽색 행각에 대한 혐오와 공포의 강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수컷들의 냄새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언어, 제약받지 않는 분노의 표출이 상쟁과 파괴와 정복의 말초적 쾌감이 아닌, 분별과 치유와 극복의 지혜로 이어지는 여성적 서사를 듣고 싶은 거다.

그러니,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 제발 그 입 좀 다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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