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심야독백] 잊었어? 여긴 바다야. 그리고 바다는 결코 정의롭지 않아.

그래! 여긴 바다야. 수백만의 가상 생명체, 욕망의 아바타들이 부유하고 비상하고 침잠하고 유영하는...

우리를 이 바다로 이끈 건 욕망이야. 이 바다의 창조주 댄은 이 생명체들이 각자의 욕망, 각자의 이익을 쫓아 움직이다보면, 그리고 그러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무한에 가까운 자유 속에 서로 교섭하다 보면, 어떤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지. 자생적 질서... 누구도 군림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지만, 한없이 풍요롭고, 한없이 평화로운 바다...

어때? 네가 꿈꾼 것도 그런가? 이렇게 말하면 얄밉게 느껴지겠지만, 나는 아냐.

욕망을 '이익'이라는 우리 속에 가둘 수 있을까? 천만에... 그건 착각 아니면 오만...

이익은 그 의미를 정할 수 있지만, 욕망은 그렇지 않아. 이익은 투입과 산출의 인과관계에서 추론될 수 있지만, 욕망은 투입이 산출이고 산출이 곧 투입인 영원한 고리, 뫼비우스의 띠, 클라인의 항아리 같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냐...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백, 수천만의 욕망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뒤엉키고 교접하고 때로는 서로를 찢어발기고 때로는 위무하는 대혼돈의 바다가 이곳이야.

이곳이 정의로울 수 있으리라 생각해? 기대를 접어. 바다의 정의는 그런게 아니야.

바다의 정의는 멸종과 번성의 무자비한, 무차별적인 순환에 있어. 탐욕에 눈이 먼 고래들의 분탕질이 바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면, 이 단순하기 짝이 없는, 허점투성이 생태계의 먹이 사슬 맨 아래쪽부터 죽음의 기운이 잠식하지.

그렇게 절멸의 사이클은 시작되는 거야. 그리곤 어느새 공멸의 공포와 각자도생의 욕망이 서로를 먹이 삼아 기하 급수적으로 증식하고...

그렇게 종말을 향해 끝모르게 추락하다보면 나중에야 깨닫게 될 거야. 어느덧 번성을 향한 새로운 사이클의 시작되었음을... 절멸의 사이클이 남긴 잔해들이 새로운 번성의 자양분이 되는 거라구...

바다의 정의란 이런 거야. 선과 악, 강자와 약자, 목적과 수단, 원인과 결과 따위는 가리지 않아. 무차별적이고 무자비하다구... 바다는 스스로에게만 정의로울 뿐, 그 안에 살고 있는 이 미미한 생명체들에겐 결코 정의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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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정의롭지 못한 바다를 떠날 거냐고? 글쎄... 그럴 거 같지는 않아. 오히려 당분간, 아니, 꽤 오랫동안 이 바다의 모험을 즐기게 될 거 같은 예감이야.

두 달 전, 내가 이곳에 온 건, 이 곳을 창조한 '눈먼 시계공' 댄의 설계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 아냐.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워. 오히려 댄의 설계가 '허점 투성이'였기 때문이지. '정의할 수 없는 것'으로 정의되는 욕망의 터전으로서 '허점 투성이'는 역설적으로 대단한 장점이거든.... 물론 '허점'을 '장점'이라 포장한 선전에 현혹되었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겠지만...

혹시 알아? 이 비루한 욕망의 아바타들이 아찔한 추락과 절멸, 도둑처럼 찾아드는 번성의 사이클을 거듭 경험하다가, 어느 순간 '합목적성', '합리성' 따위의 가당찮은 오만을 버리게 될지... 그리하여 욕망의 진정한 긍정이 절제와 배려임을 깨닫게 될지... 그런 다음, 그러한 집합적 깨달음에 기초한 새로운 질서가 이 허점 투성이 설계도의 오류를 바로잡고 여백을 채워 나가게 될지 말야...

이봐 친구들!
진정한 모험은 이미 시작되었어.
이 폭풍우가 잦아들 때까지, 이 절멸의 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내 손을 잡아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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