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시민의 글쓰기-청춘의 독서 2
- 서구역사의 창시자
- 인간과 권력과 시대- 사마천
- 역사서설, 무깟디마-할둔
- 반면교사 있던 그대로의 역사- 랑케
- 마르크스의 역사법칙
- 고단한 민족주의 역사학-박은식,신채호,백남운
- 역사가 된 역사이론서 E.H. 카.
- 문명의 역사, 슈펭그러,토인비,헌팅턴
- 역사와 과학의 통합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 참고문서: 국가란 무엇인가,
청춘의 독서,
총균쇠, 사피엔스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DA00, NAVoo 등 주요포털의 책 소개에서 쉽게 저자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탐구의 책이라고 소개 되지만, 제가 볼 때 이 책은 그런 질문과 탐구의 책이 전혀 아닙니다. -반말주의!!
유시민은 역사에 대해 스스로 탐구하고 입장을 정리했고, 역사의 질곡 속에 부대끼며 지식인의 제 역할을 감당할 뿐, ‘역사란 이런 것이다’ 말하지는 않는 분이다.
본인이 서문에서 밝히듯 [역사 기록의 역사]일 뿐이다.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들’의 책들과 ‘역사란 무엇이가?’ 고민한 역사학자들의 기록들을 정리한 책이다.
청춘의 독서는 [공산당 선언]으로 문을 열고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가로 마쳤었다. 랑케의 역사를 ‘종이와 풀’의 역사라고 비판한 바 있다. 유시민은 [역사란 무엇인가] 의 제 4장 “역사는 어디로”에서 카가 역사의 원인과 인과관계를 찾는 역사가의 모습을 역설한 다음부분에 100%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목적을 ‘그리스인과 야만인들의 행위를 보존하고 왜 싸웠는지 그 이유를 밝히는 것’이라고 적었다.
카의 노트에서 보듯 역사를 ‘이색적인 일화 수집’으로 보는 경험주의를 비판한다. 그는 기번이 ‘연관체계를 지배하는 사실을 구별해 낼 수 있는 사람, 즉 역사가이면서 철학자인 사람만이 최고의 역사를 쓸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 동의한다. 또한 기번이 ‘사실의 연구에 철학이라는 학문을 적용한 최초의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밝힌다.[역사란 무엇인가 중]
이런 의견들과 태도들의 내용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역사의 역사이다
오늘 그 중반부 랑케~ 카, 소개합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지금 읽어보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와 마지막 사피엔스 부분은 다음에^^
청춘의 독서에서는 빠졌던 랑케가 당연히 이 책에선 한 쳅터의 주인이다. ^^
랑케는 평생을 바쳐 역사적 사료만을 엄청나게 읽고 조사하고 썼다는 점에서 타고난 역사가라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격동과 변화의 시기에 막시밀리안2세의 역사교사였던 그에겐 그것이 허용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의 문서고로 흘러들어간 베네치아의 문서들과 로마의 문서들을 뒤져볼 권한을 획득할 만큼의 명성을 누렸다.
베를린의 문서고도 방대했지만 이탈리아 문서고에 비하면 대단치 않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그 모든 소장품을 확인할 지원을 확보하고 우선 빈으로 갔다. (중략) 메테르니히(오스트리아 총리)는 나에게 문서고 이용을 허락함으로서 영원한 공적을 세웠다
....
중략합니다.
,,,,
http://www.happycampus.com/report-doc/22200873/
......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것’
그건 랑케가 문자에 대해 무식해서...
역사란 언어의 그물로 길어올린 과거일 뿐이다.
.....중략........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호언은 이런 문자의 한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목적의식을 버리고 랑케를 추종한 우리 역사학자들은 영리한 것이다. 도매금으로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긴 했지만 말이다.
유시민의 랑케에 대한 평가는 이미 유명하지만, 직접 발췌 요약을 통한 이런 분석은 흥미롭다.
<공산당 선언>
지금까지 존재해 온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자유민과 노예, 귀족과 평민, 영주와 농노, 길드 조합원과 직인, 요컨대 ...억압자와 피억압자는 각 시기마다 사회 전체가 혁명적으로 개조되거나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 모두가 함께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투쟁을 때론 은밀하게, 때론 공공연하게 끊임없이 벌여 왔다.
일찍이 역사상의 각 시기마다 거의 모든 곳에서 ...고대 로마 시대에는 귀족과 기사와 평민과 노예, 중세에는 봉건 영주와 가신과 길드 조합원, 직인과 도제와 농노가 존재했다. 현대 부르주아 사회는 계급적 적대 관계를 해소하지 못했다. 그것은 낡은 것을 대신해서 새로운 계급과 새로운 억압 조건과 새로운 투쟁 형태를 확립했을 따름이다. 계급적 적대 관계가 단순화되었다. 사회 전체가 대단히 적대적인 두 진영, 즉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로 한층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매뉴팩처가 확립된 시기에는 봉건 귀족에 맞서 싸우는 견제자로서 반(半)봉건적 질서나 절대 군주제를 옹호함으로써 사실상 막강한 군주제의 주된 토대가 되었던 부르주아지는, 현대적 대공업이 확립되고 세계 시장이 형성된 이후로 현대의 대의제 국가에서 드디어 독점적 정치 지배력을 획득했다.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지는 자신이 지배권을 획득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목가적인 관계를 끝장냈다. 부르주아지는 ‘타고난 신분’에 인간을 속박하는 온갖 봉건적 유대관계를 가차 없이 토막 내어 버렸다. 또한 부르주아지 덕분에 사람들 사이에는 적나라한 이기심과 냉혹한 이해타산 말고는 아무런 관계도 남지 않게 되었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환상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착취형태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고 노골적이고 잔인한 착취 형태로 바꾸어 놓았다.
그들은 의사나 법률가나 성직자나 시인이나 학자를 자신이 고용하는 임금 노동자로 전락시켜 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가족끼리 다정다감한 정을 나누는 가족 관계를 오로지 금전만 따지는 관계로 전락시켜 버렸다.
자신의 생산물을 팔기 위한 시장을 끊임없이 확대할 필요성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지구 곳곳을 누비면서 돌아다닌다. ...부르주아지는 산업의 국내적 기반을 그 토대부터 파괴해 버렸다.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온 모든 국내 산업이 이미 파괴되었거나 매일같이 파괴되고 있다.
이러한 착취는 이제 프로레타리아트가 스스로 혁명을 통해 사회전체를 착취와 억업의 구조에서 해방시키지않고는 억압하는 계급 스스로 자신을 해방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과거기록이 아닌 현실분석, 미래 변화를 위한 ‘이론’
● 이것은 특정 세대의 역사가 아니라 모드 사회현상을 밝히는 추상적 이론이다. 마르크스는 과거를 해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재를 분석해서 미래를 변화시킬 목적으로 이 이론을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인간해방의 복음으로 받아들였다. 이 혁명이 공산주의에게 권력을 주는 것을 넘어 모든 역사에 만연한 대립과 착취의 역사구조를 종식시키고 인류에게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 준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슴뛰는 복음인가? 레닌과 스탈린이 그 열광을 솜씨좋게 이용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믿어지는 시기에 사람들의 정신이 역사를 만든다는 주장을 넘어서서 ‘물질생산에 얽힌 이해관계’가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상업 공황‘ 터무니없는 과잉 생산이라는 전염병을 부르주아의 실패의 증거로 찾았다.
이 사회는 갑작스럽게 잠시 야만적인 상태로 퇴보한다. 마치 기근이나 파괴적 전면전이 발생한 것처럼 모든 생활 수단이 공급되지 못하고, 공업과 상업이 파괴되어 버린 상태가 된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제도를 무너뜨릴 때 사용했던 무기가 이제는 부르주아지 자신에게 향한다. 그러나 부르주아지는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 줄 무기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무기를 자신에게 겨눌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현대의 노동 계급을 만들어 냈다.
마르크스는 기계의 발달로 임금은 하향 평준화되어 단일계급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부르주아지, 바꿔 말해서 자본이 발전함에 따라 프롤레타리아트, 즉 현대의 노동 계급도 발전한다.... 공장노동자는 군대식으로 조직되고 산업사병들은 부르주아 국가의 노예이며 개별 자본가의 노예이다. 소상공인, 수공업자, 농민등 모든 계급이 프로레타리아트로 전락한다. ... 모든 이해관계와 생활상태는 균등해지며, 노동자와 자본가의충돌은 계급충돌로 나아간다.
이것은 그의 희망사항이었으나 역사는 다르게 흘러갔다. 하지만 유물사관의 약점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 것에 있는 게 아니다. 혁명이후 완전한 유토피아 공산사회가 이어진다면 더 이상 그 이론은 적용되지 못한다. 즉 그 역사법칙은 보편 진리가 되지 못한다.
낡은 부루주아 사회 대신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등장한다.
지난 모든 세대를 아우른 대립의 역사이론이 혁명 후 종결되는 ‘복음’으로 끝나버리는 논리적 모순을 마르크스는 몰랐을까? 아니면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을 꿈꾸며 덮어두었을까?
그는 감수성 예민한 문과생이었다.
헤겔의 ‘변증법’, 신의 존재를 부정한 바흐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애덤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등을 모두 끌어다가 그 결점과 한계를 파악한 후 그의 유물사관과 [국가론],[공산당 선언]을 썼다.
유시민이 볼 때 이런 방대한 학술서를 쓴 지식인은 문명사에 흔치않다. 과게에 파묻혀 지낸 랑케와 달리 현실의 고통을 변혁시키는 혁명에 뛰어들었다 탁월하고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어쩌면 유시민 자신? 현실의 사회주의가 그의 이론을 비껴갔다고 평생을 위험속에 내던진 지식인의 감수성이 휘발 되어선 안 될 일이다.
마르크스는 과거의 텍스트를 정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은 ‘역사 이론이 정립되었’으니 증거만 수집하면 되었다. 모든 나라의 과거를 들여다보고 틀에 껴 맞추었으니 죄다 지루하고 천편일률적이다.
후쿠야마는 마르크스의 단선적 진보의 역사관의 종착역에 정 반대의 결론을 위치시켜서 역사에 관한 잊었던 관심을 되살렸다. 인간의 우월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던 이전의 모든 체제는 사라지고 최종적으로 현재의 기술발달에 힘입은 자유, 자본주의가 그 모든 동경을 충족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인류는 이제 야만으로 돌아갈 수 없고 가장 편안한시기를 맞았다. 그러므로 이제 [역사의 종말]이 도래한 것이다. 아무런 실증 데이터도 없이 온갖 철학자,경제학자등 다양한 지식을 참조한 이 이론은 유발하라리와는 다른 결론에 이른 것이다.
- 역사가 된 역사이론서 E.H. 카.
역사의 역사에서 전설이 된 역사 이론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역사기록과 역사가의 관계에서 시작한다. 신라통일을 옹호해야했던 김부식은 김유신을 영웅으로 그렸고 일제병탄시기 강력한 무력투쟁의 필요를 인식했던 신채호는 사대주의의 뿌리 김유신을 음모의 대가로 그린 후 을지문덕, 강감찬을 찾아낸다. 역사가와 역사를 분리하는 것은(랑케) 무지의 소치인 것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의 절반이상이 바로 역사가와 역사의 관계를 발언한다.
제1장 역사가와 사실
제2장 사회와 개인
제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
제4장 역사에서의 인과관계
제5장 진보로서의 역사
제6장 넓어지는 지평선
카가 ‘역사는 문학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을 때의 문학은 ‘마음대로 지어낸 이야기’를 말한다. 그의 글을 보면 위대한 역사는 문학인 것이다.
정확성은 역사가의 의무일 뿐 미덕이 아니다. 정확하다고 역사를 칭찬한다면 좋은 목재와 콘크리트로 집을 지었다고 건축가를 칭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필요하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p 229
BC 5C 그리스를 잘 알수 없는 것은 아테네 소수 집단이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테네 시민이 그리스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지만, 스파르타나, 테베, 페르시아사람이나, 노예 등 거주민들이 그리스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 수 없다.
중세도 마찬가지다. 종교와 관련된 것은 무엇이든 기록했지만 그밖의 것들은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p 230
유시민이 든 예도 명쾌하다. 사피엔스 후손들이 먼 훗날 오로지 한 신문사의 신문철만 발굴했다면, 그게 [조선일보]냐 [한겨레]인가에 따라 미래의 랑케가 쓰는 역사는 크게 달라진다니 ㅋㅋㅋ
뒷부분에서는 이류의 미래에 대하여 쓴다. 양차대전과 핵을 겪었지만 긍정적이다. 역사도 역사학도 그 자체로 진보한다고 믿었고 ‘신의 가호’가 아니라 진보의 방향이 역사 자체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