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전 쯤의 일입니다. 딱 이맘때였네요. 대학에 갓 입학한 제자가 전화를 했습니다.
"쌤, 쌤... 저예요."
"어이~ 학교는 잘 다니냐? 어쩐 일?"
"네... 잘 다녀요. 안 그래도 쌤한테 고맙다고 인사 드리려고 전화드렸어요."
"으잉? 갑자기 왠 감사인사?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 녀석이 전화로 전해준 사연은 이랬습니다.
어느날, 교양과목으로 신청한 '정치학 개론' 수업 시간이었답니다.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와서는 칠판에 "democracy"라고 큼직하게 쓰시더니 이렇게 질문을 하시더라는군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
그때 녀석은 손을 번쩍 들고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사람들이 지배하는 겁니다."
"어? 그... 그래. 근데 너는 그걸 어디서 배웠니?"
"학교에서 배웠는데요..."
"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너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
녀석은 신이 나서 우리 학교에 대해 소개를 했고 수업이 끝난 후, 한 친구가 학교에 대한 대화를 이어가다 녀석에게 이렇게 말했다는군요.
"니가 나온 학교. 대학생은 안 받는대냐?"
녀석이 대뜸 제게 전화를 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 이유였습니다. 결국 제 자랑, 학교 자랑을 한 셈이 됐네요...ㅎㅎ
어쨌거나, 교수님께서 칠판에 "democracy"를 쓰고 그 뜻을 물었을 때, 예상한 학생들의 대답은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민주주의요," "국민이 주인되는 거요."
이런 대답이 나오면 democracy라는 말의 어원(demos + cratia)에 대해 설명한 다음, 사람들에 의한 지배, 다수에 의한 지배 등등으로 설명을 이어가려고 했겠죠. 그런데 우리 잘 배운 제자께서 그 과정을 모조리 생략해 버린 겁니다. ^^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헌법에서는 '국민'이 아니고 '사람'인가? 왜 민주주의는 '국민의 지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지배'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헌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대답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헌법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정리해 놓은 겁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다음(개정안 발의), 각 구성원들이 그 내용의 정당성에 합의하는 과정을 거친 후(국회의결 및 국민투표), 국가 공동체 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삼는 것(공표및 발효)이죠.
오늘날 절대 다수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이 그러하듯, 대한민국의 헌법 체계 역시 사상적으로는 계몽사상,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계약설", 하나만 딱 꼬집어서 이야기 하자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계몽사상가들의 흥미진진한 대답에 관해서는 두 달 전에 올려드린 다음 두 글에서 자세히 설명해 드렸습니다만...
우리 헌법의 근간을 이루는 로크 식 사고방식을 다른 식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됩니다.
헬멧: 결혼이란 게 뭘까?
여왕: 뭐라고 헬멧? 이 여왕에 대한 애정이 식었구나. 헬멧을 떠날 때가 됐나봐. 여왕 없이 한번 살아봐, 그럼 결혼이 뭔지 알게 될테니...
헬멧: 그건 안돼. 여왕 없이 난 못살아.
여왕: 왜? 총각일 때도 잘 살았잖아. 곁에서 잔 소리하는 사람 없이, 뭐든 하고 싶은대로 하고... 나 없으면 더 좋지 뭘 그래?
헬멧: 아니, 그러니까 결혼하기 전에도 그냥 저냥 잘 살긴 했지... 그러니까... 지금보다 자유롭긴 했지만... 술도 많이 마시고, 돈도 많이 쓰고, 사고도 많이 치고... 암튼 너 없인 난 못 살아... 가지 마~
여왕: 이제 결혼이 뭔지 알았지?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해~~
헬멧: 응...ㅠㅠ
(주의: 본 대화는 특정 인물, 특정 사실과 관련없음)
감 잡으셨나요? 결혼, 아니 국가를 보는 로크의 관점에 대해서는 저도 할 말이 많지만^^ 각설하구요. 이 글에 주제에 집중하자면...
한 남자/여자가 결혼을 하면 '유부남/유부녀'가 됩니다. 결혼 이전 상태를 가리켜 '처녀/총각'이라고 하죠.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국가라는 제도 속에 들어가면 '국민'이 됩니다. 이전 상태를 '자연상태'라 부르는 것이구요.
따라서, 논리적으로 총각 상태의 '남자'가 결혼을 함으로써 '유부남'이 되는 것처럼, 자연상태의 '사람'이 국가라는 제도를 받아들임으로서 '국민'이 되는 겁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제출한 헌법 개정안, 그 중에서도 '사람'이라는 표현을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인데요.
한쪽에서는 '국민'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은 것을 두고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공격을 합니다. 그들에게 '국민'의 반대말은 '인민'인지라, '국민'이라는 말 대신에 쓰이는 '사람'이라는 말은 곧 '인민'의 동의어인 셈입니다. 좀 이상한 논리죠?
다른 한쪽에서는 '국민'이라는 말이 '황국신민'이라는 일제의 용어라면서 헌법에서 완전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래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핀트가 어긋난 느낌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말을 너무 사랑해서 '유부남/유부녀'라는 한자어를 쓰고 싶지 않다면 그러려니 할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결혼 이후의 남녀를 가리킬 말(품절남/품절녀? 지어미/지아비?)은 필요합니다. 그냥 남자/여자로 퉁칠(?) 일은 아니라는 거죠.
현행 헌법 제2조에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어색합니다. 마치, '결혼 생활의 주체는 유부남/유부녀다'라는 말처럼...
결혼 생활의 주체가 '남녀'이듯, 대한민국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결혼 여부아 상관없이 남녀가 가지는 권리와 의무가 있고, 유부남/유부녀로서 가지는 권리/의무가 있듯, 국가 공동체에서도 '사람'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의무가 있고 '국민'으로서 가지는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일입니다. 이를 두고 이념다툼을 벌이는 분들... 제가 볼 때 다른 소일거리를 찾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 거 같습니다.
이상, 독립 마법학교의 머글 연구 마스터 헤르메스였습니다~ 다음에 뵙죠,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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