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 여섯장을 읽기 전에 가볍게(?) 읽어야 할 책...by @raah
가이사, 케사르, 카이사르, 차르 ... 그는 서양 모든 왕의 이름의 기원이다.
-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 [갈리아 전쟁기]. Gaius Julius Caesar . (BC100~44)
갈리아 전쟁기는 정복자 카이사르 자신이 직접 기록한 책이므로 갈리아인들 입장에서의 독립노력이나 그들의 승전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다. 자신을 3인칭 ‘카이사르’로 명명하며 객관적 으로 서술하려 노력한 흔적은 있지만 승자가 자신을 광고하기 위해 기록한 책임에 틀림없다.
고대의 위대한 장군이 자신의 출정을 직접 들려주는 유일한 책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는 알렉산더, 킹기스칸, 나폴레옹에 견줄 만 하며 삼국지 저리가라할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이렇게 글로 남겨 베스트 셀러를 만들었으니 그의 정치감각이 탁월하다.
저자 카이사르는 명문가이지만 세력가에서 밀린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첫 번째 결혼을 한다.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참혹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한다. 23세에 잠시 로마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으나 실패하고, 술라파의추격을 피해 국외로 도주해 목숨을 유지한다. 7년간의 도피생활을 한 후, 27세에 제사장에 임명된다. 30세에 회계감사관, 35세에 안찰관 취임,37세에 최고 제사장, 38세에 법무관에 취임한다.
마흔이 되던 해에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삼두 동맹을 맺는다. 41세에 집정관에 선출되고, 42세에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여 8년간 갈리아 전쟁을 치른다. 전쟁 후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갈리아 전쟁 후에 벌어진 5년간의 내전에서 승리자가 되면서 로마 제일의 권력자가 되지만 원로원 회의장에서 공화파들에게 살해된다.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 벨기에, 독일, 스위스 일대를 포함하는 서유럽 지역으로, 이곳에는 기원전 60년 당시 100여 개 이상의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로마의 속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갈리아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은 수시로 로마의 국경 지대를 공격하면서 반란을 일으킨다. 카이사르는 이곳에서 크라수스에게 빌린 돈으로 스스로 군대를 모집하여 증강한 후 갈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지배체제를 확립한다. 8년간 갈리아 전역의 부족들과 벌인 전쟁의 기록이 바로 [갈리아 전쟁기]이다. 흥미진진하다.
카이사르는 10군단을 독려한 후 우익으로 달려갔다. 이곳에서 아군은 크게 고전하고 있었다. 여러 대대의 기들이 한곳에 몰린 탓에 12군단 병사들은 너무 밀집해 있었고 이로 인해 서로의 전투에 지장을 주고 있었다. 4대대는 백인대장들이 모두 전사하고 기수가 살해되었으며 대대기마저 사라졌다. 다른 대대의 백인대장들도 몇 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용맹함으로 명성이 높은 수석 백인대장 푸블리우스 섹스티우스 바쿨루스마저도 온몸에 중상을 입어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다른 병사들도 움직임이 둔해졌고, 후방의 병사들 중에는 투척 무기를 피하기 위해 대열을 이탈하고 물러나는 자들도 있었다. 적은 공격을 늦추지 않았는데 정면 아래에서는 언덕 위로 밀고 올라오고, 양쪽 날개에서는 계속해서 아군을 압박했다. 전력 보강마저 불가능한 위태로운 상황에서 카이사르는 (자신의 방패를 두고 왔기 때문에) 후방의 한 병사로부터 방패를 빼앗아 들고 최전선으로 나아갔다. 그는 백인대장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독려하고, 병사들이 검을 보다 쉽게 휘두를 수 있도록 앞으로 전진하여 대열을 넓히라고 명령했다. 카이사르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희망과 용기의 불씨를 되살렸다. 병사들은 저마다 큰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총사령관에게 분투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자 적의 기세가 주춤해졌다. p.113~114
카이사르의 이 전쟁으로 인해 도시 국가 로마는 새로운 국경에 대해 넓은 시야를 갖게 되었다. 역사자체가 승자의 시선이기는 하지만, 라인 강과 도버 해협을 두 차례씩 건너면서 유럽 내륙에 <그리스-로마 문화>가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해 서유럽 문화권의 기틀을 제공했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갈리아 전쟁기』에서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군이 펼친 군사적 전략과 기술에 대해서도 상세히 기록한다. 처참한 전쟁의 실상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적군의 용맹함과 적군이 펼치는 전략적 우수함을 볼 때는 스스로 놀라움을 감추지 않는다.
로마 속주의 국경을 침범한 헬베티족과 게르만족인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투를 시작으로, 북쪽의 벨가이를 공격하고, 알프스 산악 부족을 정복, 베네티족과 대서양 전투, 게르만인과 브리타니아 정복의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로마군이 학살당하고 두 곳의 진지가 맹렬한 공격에 시달린 사건과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로 일어난 갈리아 대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아르베르니족과 핵심 부족들이 일으키고 로마와 우호관계를 유지한 하이두이족까지 가세한 갈리아 대반란은 로마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갈리아인들의 필사적인 저항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갈리아 정복기에는 카이사르자신이 갈리아 인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기록한다. 때로는 관대하고 때로는 단호하고 잔인하다.
카이사르는 에부로네스족의 영토를 파괴한 후 원정 중에 잃은 두 개 대대를 제외한 전 군대를 이끌고 레미족 도시 두로코르도룸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갈리아 회의를 소집해 세노네스족과 카르누테스족의 음모를 조사했다. 반란의지도자인 아코는 보통 때보다 무겁게 형별이 내려져 오랜 관습에 따라 죽을 때 까지 때린 후 목을 베는 로마의 관습
처형되었다. 처형이 두려워 도망친 공모자들에 대해서는 모든 권리를 박탈 물과 불의 사용 금지, 즉 추방이다.
했다. p 267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 그의 부친은 전갈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했으나 왕위에 오르려다 살해 되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누구보다 탁월하게 피보호민을 불러모으고 선동했다. 그의 계획이 알려지자 수많은 무장한 자들이 몰려왔다. 그의 숙부와 지도자들은 이 일에 반대하여 그를 도시 밖으로 추방했다. 그러자 그는 드넓은 시골지역을 다니며 무법자,범죄자를 끌어 모아 군대를 조직하고 ‘자유를 위해 무기를 들라’고 부족을 선동하여 최근 그를 추방했던 반대자들을 추방했다. 지지자들은 베르킨게토릭스를 왕으로 선포했다. 그는 모든 곳으로 사절을 보내 충성을 요구했다. 세노네스족, 파리시족, 픽토네스족, 카두로키족 투로니족, 안데스족과 해안지방의 모든 부족들과 동맹을 맺었다. 273
도망자 신세로 쫒겨 다니는 암비오릭스를 붙잡기는 어렵겠지만, 카이사르의 명성을 위해 범지자의 영토와 건축과 가축을 철저히 약탈하기 위해서 출동했다. 그렇게 한다면 행여 살아남는 부족민이 있다고 해도 그를 증오하게 될 것이므로 암비오릭스는 영원히 그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었다. 카이사르는 암비오릭스의 영토 곳곳에 군단이나 외인부대를 출동시켜 살육과 방화와 약탈로 모든 곳을 파괴하게 했다. 그런 다음 2개 군단을 트레비리족 영토로 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전투를 벌이게 했다. 그들은 게르만인과 다를 바 없어서 무력이 아니면 결코 명령을 듣지 않았다. 370
적은 갈증으로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아군이 판 땅굴로 우물이 마르자 신의 뜻이라 믿도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카이사르의 관대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가혹해 보인다 해도 사람들이 이를 그의 잔인성 때문이 아니라 일벌백계의 의미로 전시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의 목숨은 살려주되 무기들 들고 대항한 자들의 손목은 잘랐다. 381
제8권 첫머리에는 “이제 갈리아 전체가 복속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시기 로마는 내전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마침내 루비콘 강을 건넌다.
- 카이사르와 황제정
카이사르는 탁월한 문명론자였다. 역사적 전투를 치르면서 경험한 아테네, 로도스섬, 알렉산드리아 등의 첨단 지식을 로마에도 뿌리내리게 하고 싶었다. 대학과 도서관을 건립하고 파피루스로 철한 책을 만들게 했다. 고정 환률 금화, 율리우스력을 시행하는 등 로마를 ‘세계의 수도’로 만들 계획을 진행해 갔다.
그를 위해 어마어마한 전쟁을 도모했다. 틀간실바니아(루마니아,헝가리), 발칸, 아나톨리아와 아르메니아(터키)를 흡수하고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그 파르티아인을 바빌로니아와의 전쟁에 투입하여 카스피해와 옥수스 강에 이르는 장대한 지역을 평정하고자 했다.
파르티아 기마대가 위협적인 전투 집단이 되어 이란 평원을 장악해 갔다. 이들을 몰아내야 했다. 이 모든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왕’이 되어야 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를 쳐부수고 인도까지 갈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리스의 신의가 뒷받침 된 왕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제국의 재건을 꿈꾸는 클레오파트라도 카이사르에게
- “파르티아인은 왕에게만 항복한다”라는 예언을 얘기하며 설득했다.
카이사르는 대업을 이룬다는 명목 하에 ‘신으로부터 받은 왕권’을 손에 넣고자하는 집념으로 가득 찼다. 동방의 모든 속주에 한해서 나로 하여금 왕으로 칭하도록 하라는 말도 전해진다. 공화제를 선호하는 로마 귀족들은 이에 격노했다. 91
옥타비아누스는 31살에 카이사르가 남긴 과제를 거의 다 이루었고 원로원은 그를 견제할 힘을 잃었다. 시민들도 수 십년간 ‘민주 공화제’의 부패한 모습을 봐 왔으므로 그것이 환상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는 신중을 기했다. 먼저 전쟁이 그쳤으므로 50만 군대를 20만으로 축소했다. 대규모 공공사업을 실시하고, 관료조직을 정비했다. 행정관 아그리파, 재정가 마이케나스, 티베리우스 장군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귀족들은 부르주아 출신인 그들에 대해 불평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귀족출신 원로원 중 20명을 선발하여 정치요직을 관장하는 추밀원 의원으로 임명하여 원로원을 통제했다. 평민주축의 민회가 줄어들었다.
그는 13회 집정관에 연속 당선되었다. BC29년부터 임페라토르(최고사령관)에 이어 제1시민 칭호를 받았다. 어느 날 옥타비아누스는 돌연 권력을 원로원에 반납하고 예전 공화제로 돌아간다고 선언하고 사퇴했다. 원로원의원들은 곧 모든 권력을 옥타비아누스에게 위양하고 로마의 전권을 장악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서 ‘아우구스트스-제왕’ 칭호를 바쳤다. 옥타비아누스는 ‘내가 바라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의 간청을 받아들였다, 500년 만에 정식‘독재관’이 탄생했다. p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