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군대의 방종과 황제들(6~11장)
1) 카라카라의 만행
213년.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카라와 게타가 서로 동등하게 제국을 다스리기를 바랐지만, 세베루스의 현명한 가르침들은 아들의 마음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했다. 두 아들은 서로 적대적이었다. 세베루스 사망 후
카라카라는 213년 게타를 살해하고 로마를 떠나 다시는 로마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오직 군단병들의 후원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는 속주들을 옮겨 다녔으며 속주들은 차례로 약탈과 잔혹행위이 무대가 되었다, p 158
- 마크리누스,==> 엘라가발루스의 학정,찬탈,우행
총애 받는 근위대장 마크리누스, 변덕스런 황제의 기분에 따라 위태해질 수 있는 상황. 사소한 의심도 생명을 위협할 수 있었다.
근위대장은 불경한 소문으로 인한 파멸을 스스로 막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다.
하지만 카라카라의 학정으로 국가 재정은 바닥났고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원로원은 신분도 알 수 없는 새 황제가 불만이었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군대를 개혁하려 한다. (군대를 손보려 하다니..ㅉㅉ)
카라카라가 군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폭발적으로 올려 주었던 급료를 손보기 시작했다.
군대를 손보려 하다니..ㅉㅉ
모든 속주민들에게 로마시민권 풀어버린 것 포함 로마쇠망의 주범이 카라카라인듯.....
218년 아메사 주둔 군대가 카라카라의 사생아로 알려진 안토니누스의 황제선언과 군대의 집결.
황제를 갈아치운다
새 황제가 된 안토니누스는 엘라가벨루스라는 이름으로 방탕하고 여성적 취향으로 국고를 낭비했다.
2) 고트족의 이동
고트족이 다키아로 밀려 내려왔다. 트라야누스가 정복(106년)한 이래 다키아는 수비가 취약했다.
고트족의 공격에 로마 수비대는 서둘러 패주하고 문책이 두려워 고트족과 내통하여 고트족에 합세했으므로 고트족은 쉽게 도나우강을 건넜다. 이들을 격퇴하기 위해 왔던 데키우스 황제(249년~재위)는 고트족의 기습으로 제국사상 처음으로 패주했다. 고트족은 필리포폴리스를 약탈하고 학살했다.
돌아온 데키우스와 7만 로마군은 필리포폴리스를 포위했다. 고트족은 도시를 지배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다. 고트족은 ‘철수’를 협상했으나 황제는 그들을 격퇴하고 싶었다. 무리한 전투로 사투를 벌인 끝에 고트족의 1진과 2진을 섬멸했다. 그러나 로마군이 습지에 발을 들인 순간 고트족 3진의 반격으로 로마군은 전멸했다,
데키우스의 아들, 어린 호스틸리아누스는 야만족에게 온갖 편의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제국을 침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액을 배상금을 매 년 지불한다는 굴욕적 조건으로 협상했다.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난립
다음 황제 갈루스는 주지육림에만 빠져 주지사 아이밀리아누스에게 야만족 토별을 맡겼다가 결국 황제자리도 빼앗기고 만다. 그러나
아이밀리아누스도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주둔군을 구원한 갈루스의 충신 발레리아누스군이 다가오자 4개월 만에 부하들의 배신을 맛보아야 했다.
혁명과 모반 배신의 소용돌이 시대 속에서 발레리아누스는 어떤 부정행위도 없이 모두의 존경을 받으며 황제에 취임(253)했다. 그러나 공치제로 자신의 불량한 아들 갈리에누스를 정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왕이 아르메니아를 비롯 유프라테스 강 양쪽 도시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약탈했다. 심지어 아데사 전투에서는
발레리우스 황제가 페르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혀 옥중에서 죽어간다.
이 소식을 들은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고한다,
무능하고 민중의 고통을 외면하는 잔혹한 황제가 황제자리에 있으니 제위를 노리는 참주들이 속출했다. 발레리우스는 그들을 잔인하게 토벌했다,
샤푸르 왕이 추대한 로마의 망명자
페르사아 왕 샤푸르의 꼭두각시 ‘키리아데스’가 로마황제에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