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에서 그리스도교의 비중은 상당하다.
그만큼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과 이후 서양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 책에 대한 평이 이 부분에서 갈린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하지만 작가의 탐구력을 어느정도만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이 부분을 읽어보면 ‘종교- 그리스도교’부분에 대한 평가의 좌우는 어쨌든 편견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진리를 찾는 마음으로 신앙과 믿음의 연단을 받아보시라고...^^
아무튼 탐구심이 있는 독자라면 이 역사적 기록이라해도 무방할 이 책을 읽고나서
현재의 기독교나 가톨릭이 ‘믿음의 범주’에 넣고 교육하고 전수하는 많은 교리들이
그다지 예수님이나 신으로 부터 유래한 것이 아님을, 그닥 정통성이라 할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신앙은 무조건 믿기보다는 전후좌우를 탐구한 후에도 지켜져야 신앙일 것입니다.
모세오경과- 복음서의 예수님의 언행, -바울서신,- 요한 계시록 이 네 가지 책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 많은 모순을 보이지만 신앙인들은 모호한 교리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른 그 오직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라고 자극받습니다. 무엇을 위해?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그래서 신앙은 맹신에 이를 위험이 높아졌고 성경의 가르침과 교회가 무관한 관계로 흐르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든 잘 관찰해 보시면 가끔 교회보다는 주식회사에 가까운 곳이 많습니다.
6. 그리스도교(15,16장,27장)
1) 초기의 교회-유대교+기독교
교회가 유대교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는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인 유대인 개종자들은
예수를 예언자와 스승으로 존경했지만, 선조들의 의식을 고수하면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이를 강요했다.
그들은 모세 율법의 신성한 기원과 창조주의 절대적 완전성을 내세웠다. 만일 신이 자신의 선민을 구별하는 데 사용한 신성한 제 의식들을 폐지할 의도가 있다면, 그 폐지는 최초의 선포 이상으로 명확하고 엄숙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메시아 자신(예수)과 그 제자들도 몸소 모세 율법을 엄밀하게 준수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그 의식들을 폐지한다고 선포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스도교는 모세의 율법으로 무장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 속박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신성한 권위는 그리스도교의 굳건한 기반으로 인정되었다. 그리스도 사후 40년동안 사도들이 직접 관리한 초창기 전통이 표준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당연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초석을 다진 사람들은 나중에 나사렛 파로 불리게 되는 유대인 개종자들이었지만 그리스도 깃발 아래 모여든 이교도 개종자들에게 수적으로 압도당했다. 이방인 신도들은 특별사도 (바울)의 승인아래 모세의식을 벗어버리는 관용을 받았으나 곧 다른 신도들에게는 관용을 베푸는 것을 잊었다.
나사렛파는 예루살렘의 폐허를 떠나 펠라로 가서 60년 동안 고립된 상태에서 쇠퇴해 갔다. 이 광신적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기대했지만, 하드리아누스 때에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유대인 예루살렘 금지령
황제는 거듭된 반란에 분노해서 시온에 도시를 만들고 유대인 금지령을 내렸다. 나사렛파가 이 금지령을 벗어나는 방법은 한가지였다. 세속적 고려가 진리의 힘을 압도했다. 그들은 아마도 이탈리나 이방 출신의 소라 도원장 마르쿠스를 주교로 임했다. 그리고 그의 설득에 따라 대다수 백년 이상 시켜온 모세 율법을 포기했다. 그들은 이를 포기하고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에 자유로이 출입하며 가톨릭교회와 결합을 공고히 했다. 예루살렘 교회가 회복되자
라틴인 주교와 함께하기를 거부한 나사렛파에게 이단의 죄목이 모두 전가되었다.
에비온파는 유대의 정통 진리관을 고수하며, 모세의 율법을 폐지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노시스파는 모세 율법의 불완전을 보고 신에 의한 제정을 부정했다. 다윗과 솔로몬의 여자관계를 집요하게 비난했다.
그노시스파는 물질의 영원성, 두 가지 원리의 존재, 비가시적 세계를 다루면서 그리스도 교리와 동양철학, 조로아스터교 의 심원까지 모호한 교리를 혼합했다.
결국 쉰 개가 넘는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
각각의 종파들은 각기 자랑하는 주교와 집회, 학자와 순교자를 가졌으며 정통 교회의 4대 복음서 대신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언행을 저마다의 교리에 맞춰 수많은 사서를 만들어 냈다. p 555
2) 삼위일체 논쟁과 교리들
삼위일체 논쟁은 로마인들과 야만인들 간의 세속적 관계는 아리우스파의 신학적 논쟁과 깊이 얽혀있다. 이 철학적 논쟁의 오류와 열정은 복잡하다.
BC360년 플라톤: [신성]은 제1원인, 이성(로고스),
프라톤은 ‘우주의 혼’이라는 삼중의 변형체라고 생각했다. 특히 로고스는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 세계의 창조주와 지배자라는 좀 더 접근하기 쉬운 성격의 것이다.
- 그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30년을 연구해도 이해하기 어려운 비밀스런 학설이다.
마케도니아인들이 무력으로 이를 이집트로 퍼뜨렸다. 이 로고스 신학은 약간의 수정을 가해 알렉산드리아 학교에서 가르쳐졌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유대인들 이민단을 수도에 정착시켜 주었다. 얼마후 유대인들은 이를 자기 선조들의 신성한 유물이라 주장했다.
플라톤 철학이 솔로몬의 지혜로
BC 100년.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쓴 철학 논문은 명백히 플라톤학파의 문체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만장일치로 ‘솔로몬의 지혜’로 인정받았다.
이와 유사한 모세 신앙과 그리스 철학의 결합은 필론
필론:당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사회의 지도자이며, <구약성서>를 그리스 철학, 특히 플라톤의 사상을 원용하여 비유적 해석을 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즉 그의 <창세기> 해석을 예로 들면,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전개되어 있는 데미우르고스(造物神)와 이데아의 관계를 교묘히 엮어 넣으면서 전체가 신에 의해 창조된 혼의 타죄-정화의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그에 의해 <구약성서>의 신의 초월성은 주로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의해서 비로소 이론적으로 뒷받침되어 체계화되었다. 또한 그는 저서 중에 유대인의 종교상 절대적 정당성을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을 많이 인용하면서 증명하려 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당시의 사상을 알기 위해 그의 저서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그의 사상은 신플라톤 주의나 그리스도교 교부 및 근세의 스피노자 철학 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백과사전
필론의 플라톤주의는 르 클라크(Le Clerc)가 의심의 여지없이 입증한 바 있다. 바스나지(Basnage)에 따르면 필론의 신학 작품들은 그리스도의 출생 이전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 저자각주
의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데 대부분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쓰여졌다.
그들은 로고스를 야훼에 적용했다. 또한 우주의 본질과 이질적인 현실적 직분을 수행하는 신의 아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강림하게 했다. 아리우스 이전 까지는 이 개념이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자유롭게 받아들여졌다.
AD 97년, 플라톤의 로고스와 유대인의 정신적 발전은 사도 요한의 요한복음 1장 첫 부분에 정확하게 거룩한 붓으로 승인된다.
플라톤주의자들은 이 글이 자신들의 정확한 원칙을 잘 담고 있다고 하여 높이 평가한다.
* 영혼불멸과 천년왕국, 속죄의 교리들
모세 오경에 없는 영혼불멸설
본질적 종교원리는 아론의 뒤를 이은 세습 신관에게 대대로 위임되었을 텐데, 모세의 율법에 영혼불멸의 교리가 빠져 있음을 알게 되면 놀라게 된다. 이 교리는 예언자들에 의해 막연하게 암시될 뿐이며, 출애굽기와 바빌론 포로기 사이의 긴 시간동안 유대인들의 관심은 현세에 한정되어 있다. p 563
이단이었으나 포함된 요한계시록
엘리야에 따르면 현세 존속기간은 6000년이다. 동일한 유추에 따라 거의 끝나가는 오랜 투쟁의 시기 뒤에는 1000년의 즐거운 안식이 이어질 것이고 순교했거나 죽음을 모면한 성인과 선민들이 최후의 부활의 날까지 새 예루살렘에서 지상을 다스린다는 내용이 천년왕국설이다.
보편적으로는 용인되지 않았을지 모르나, 정통파 신자들 사이에서 이 지배적 교리는 너무나 유용하게 전도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 교리는 점차 이단종파 광신자들이 꾸며낸 이야기로 여겨지며 배격당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이 겨우 공인 성경에 포함됨으로써 이 교리도 이어지고 있다.
360년 라오디게아 공위회에서는 공인성경에서 요한 계시록이 (그 수취인으로 기록된 동양 교회에 의해) 암묵적으로 제외되었다. 그리고 술피우수 세베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런 판결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부분 인정되었다. 하지만 1. 정교회는 디오니시우스를 사칭한 한 사기꾼의 권유를 받아들였고, 2. 고전어학자가 신학자 보다 중요해질 것을 우려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라틴어 부가타 성경의 모든 부분이 ‘성경무오설’의 영향을 받아 포함 되었다. 3. 신교도들도 이 신비한 예언소로 교황청을 공격할 수 있을것이라 여겨 숭배했다. p 567
마귀를 쫒아내는 기도사의 능력은 당시엔 흔한 일이었다. 2세기 말 이레나이우스 시대를 생각해 보면 고질병을 고치는 기적이나 죽은 자의 부활도 진기한 사건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571
효과만점의 속죄의 교리:
어떤 극악무도한 죄인들도 일단 죄책감을 갖게 되면 물로 세례를 받아 과거의 죄를 씻어 낼 수 있다고 쉽게 믿었는데, 다신교에서는 어떤 속죄도 인정해 주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유명한 그리스도의 성자들이 한때 버림받은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스스럼없이 인정했고, 경건한 사람들은 더 이상 수치심, 공포 등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수많은 훌륭한 개종자들이 생겨났다. p 376
비티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총독에게 자신들은 음모는커녕 항상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죄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엄격한 의무에 구속받는다고 자신했다.
때문에 그로부터 1세기동안 종교적 이유를 제외하고는 처형당한 사람은 극소수였다.
성에 대한 엄격한 금욕주의는
인간의 관능이 영성을 타락시킬 수 있다는 모든 향락에 대한 혐오에서 비롯되었다.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무해한 증식방식으로 영생했을 것이라 여겼다.
결혼은 욕망을 억제하기 위한 임시방편의 제도일 뿐이었다. 그들이 부부결합에 관해 상세하게 부과한 온갖 별난 계율들은 신랑의 고소와 신부의 얼굴 붉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p 581
사도들이 사망하고 100년간 그리스도인들은
각 개별 교회에서 유영하고 평등한 체제로 지냈다. 그러나 교회회의가 활성화 되면서 가톨릭교회는 거대한 연방공화국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주교들은 동맹 관계를 통해 광범위한 재량권과 행정권을 얻게 되었다. 3세기에 이르면 주교들의 말투는 명령조로 바뀌고 온갖 권리침해가 나타났다, p 589
수도 대주교들 사이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세속적 명예와 우월성이 과시되었다, 교권신장과 더불어 평신도와 성직자 간에 주목할 만한 변화가 나타났다.
이하는 교리부분입니다. 관심있는 분들만 보세요 아주아주 복잡해요
모호하고 별것 아닌듯 보이지만
이후 이어지는 피비릿내나는 대 학살과 교리 전쟁의 핵심 개념들입니다.
에비온파와 나사렛파의 신앙은 조잡하고 불완전했다. 그들은 예수를 위대한 선지자로 숭배했으며 구세주가 약속한 영원한 천국에 관한 히브리 신탁들은 예수 개인과 그가 미래에 행할 통치를 뜻한다고 보았다. 그들 중 일부는 예수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났다고 인정했지만 로고스, 혹 신의 아들, 완전한 신성은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노시스파는 로고스의 숭고한 개념으로 치달아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질을 부인했다.
150년 유스티누스는 에비온파의 과오를 지적했다. 이후 그들은 그리스도교계에서 아주 하찮은 부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21장, 2권 203쪽)
아리우스파에 의하면 1)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의지에 따라 무로부터 창조된 종속적이고 자연 발생적인 산물이다. 아들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으며 모든 세계에 선행하여 태어났고 전능자 아버지는 이 유일한 아들에게 영광의 광휘를 전해 주었다. 2) 로고스는 세 가지 개별적이고 무한한 정신, 또는 실재, 즉 이 세 가지의 동등하며 영원히 공존하는 존재들이 신성의 본질이다. 3) 이 세 신격은 섭리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보이게 될수 있지만, 인간의 정신에는 동일한 존재로 비춰질 것이다.
이 가설에 의하면 삼위일체는 각기 이름과 추상적 변형들로 분화되어 이를 이해하는 정신 속에 존재한다. 로고스는 더 이상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속성이 된다. 로고스의 육화도 신성한 지혜가 인간 예수의 정신을 채우고 모든 행동을 이끈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해서 신학적 사고를 거듭한 끝에 결국 에비온파로 시작하여 사벨리우스 파로 끝나게 되며 이 불가해한 신비는 우리의 탐구영역 밖으로 벗어난다. 2권 211
325년 니케아종교회의에서 성부, 성자 동질설
성부, 성자 동질설이 인정된 후 그리스, 라틴, 동방, 교회의 동의를 얻어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 교의로 수용되었다.
아리우스파는 그들이 위험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중용을 취했다.
그들은 자비와 중용의 실천을 강조하고, 논쟁의 불가해성을 강조하며 성서에 없는 용어의 정의를 거부했다. 승리한 가톨릭 파는 아리우스파의 이단의 증거를 찾는데 혈안이 되었다.
이런 때에 에우세비우스(아리우스파)가 호모오우시온(삼위동질설)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신학체계 원칙에 어긋난다고 고백한 서신이 회람되었다.
당시 다수파는 삼위이체론과 사벨리아누스파들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제한하여 공동의 적이 내세우는 정당할지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만은 부결시키자고 합의했다. 그들의 논쟁도 ‘호모오우시온’이라는 애매한 말을 공유함으로써 중단되었으니 그 단어의 의미는 각기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이 ‘동등성’은 한편으로는 내적으로 각 신격들을 굳제 통합해주는 영적 침투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성자의 독자성과 양립하는 한에서만 인정되는 성부의 우월성을 조정하는 수준 내에서만 운신할 수 있었다.
이 영역을 벗어나면 어느 쪽이든 마귀요 이단이었다,
니케아 공의회는 호모우우시온이라는 불가사의한 단어에 정통파의 기치를 새겨넣었다.
힐라리우스는 자신이 추방당했던 아시아 속주들 열 군데를 다 뒤져 보아도 신에 대한 진짜지식을 간직한 성직자는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라며 개탄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내고 설명을 붙인 나머지 사람들 견해만큼이나 다양한 교리가 이
있고 우리들의 오류만큼 많은 독신이 있다는 것은 개탄할 만한 위험이다. 호모우우시온은 회의가 열릴 때마다 부인되었다가 승인되고 승인되었다가 수용되고, 자의적으로 해석된다. 성부와 성자의 유사성이 부분적인가 전체적인가를 두고 해마다 달마다 우리는 늘 비가시적 신비를 설명하겠다고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낸다. “2권 215
[i] 하나 차이
성부와 성자가 같은가? 의 질문에
아리우스파는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피조물이 창조주아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티우스로 반대파들은 그를 무신론자라고 비난했다.
동방요직을 손에 넣고 있는 새로운 아리우스파는 아이티우스의 날카로운 논법을 혐오한다고 공언하면서 성자는 다른 피조물과 다르며 오직 성부하고만 유사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때로는 대담하게 성부와 동일하거나 동질은 아니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본질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거부하기도 했다,
신비한 유질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된 그리스어가 ‘호모이오우시안’이었다. 정통파와 [i] 하나 차이 나는 이 논쟁은 비웃음을 샀다. 한 주교는 이 두 단어가 같은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