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 29
참혹한 전쟁이 지난 후 동료들의 시신 위에서 자신을 영웅으로 서술하는 사람.
그가 어디 묻히든 관심 없지만 영웅논쟁 자체가 좀 부끄럽네요. 그냥 난세에 고생은 좀 했겠다 싶습니다. @wisdomandjustice/7hvmwt#@oldstone/re-raah-qdiavq
참혹함과 인간의 정신성.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서평,분석,
- 빅터 프랭클과 [죽음의 수용소에서]
-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줄거리요약. 발췌
가. 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 해방과 현실.
나. 2부. 로고테라피, 존재의 의미를 아는 것
다. 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
죽음의 수용소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심리학 의사의 자기 관찰기입니다.
책의 초반부에 저자의 고백을 전체 내용을 비추는 기준점으로 봐야 할 것이다.
책 중에 저자는 살아남았고 지고한 도덕적 성취를 할 기회를 놓치고 실패했다고 고백한다.
행간에 저자가 다 밝히지 못한 것들을 더 악한 모습으로 상상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항상 의미 찾기를 스스로에게 실험하며 삶을 강하게 붙잡았다. 로고테라피를 머릿속에 기록하며 결국 끝까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남았다.
소련군 포병 장교로 근무하다 투옥되어 10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한 솔제니친은 자신이 동물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역시 살아남았다. 어쩌면 동물이 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며 솔제니친 역시 그 속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쓰고 있지 않았을까.
- 빅터 프랭클과 [죽음의 수용소에서]
수용소 생활이 너무나 비통했다는 표현도, 죽음에서 살아남았다는 감동의 내용도 없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수용소를 다룬 책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혹독한 추위 속에서의 잔혹한 현실을 리얼하게 그렸음에도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만큼 잔혹한 현실은 아니었음을 이 책을 읽고 느끼게 됩니다.
[죽음의 수용소]의 저자는 단지 관찰자적인 시점에서 자신과 주변 유대인, 간수들을 지켜보는 내용들이 많을 뿐입니다. 가능하면 담담하게 사실적으로 수용소 내부에 모습을 그려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저자를 공통을 견디고 살아남게 된 하나의 큰 능력과 힘이 되었음을 웅변합니다.
참혹하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현시에 순응하는 동물이 되거나, 고고한 인간으로 죽음을 택합니다. 그 외에도 과거를 추억하거나, 절망하거나, 낙관적 희망에 젖으며 짧게 견디다 죽어갑니다. 살아날 확률이 10%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내면의 자유’를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 남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힘과 생존을 보편화하고 ‘로고 테라피’라는 인간의 강력한 치유능력을 소개합니다.
경험과 생존으로 증명한 학설을 세운 것입니다. 수용소 이후 당연히 저자는 자신의 실험과 연구결과로 새로운 심리학설을 정립합니다.
후에 빅터 프랭클은 빈 의과대학의 신경정신과 교수이며 미국 인터내셔널 대학에서 로고테라피를 가르쳤다.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은 정신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습니다.
책은 참혹한 현실에서 인간의 감각과 정신이 어디까지 무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다른 유대인 수용소에 관련된 책과 비교해서 수용소 내부의 고통과 갈등은 물론, 종교, 정치적인 모습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가장 현실적으로 수용소 내부의 삶을 묘사했기에 수용소의 객관적 모습 관찰자적 입장에서 표현합니다.
-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는 존엄을 빼앗긴 사람의 무디어진 감각과 정신을 표현했다는 면에서 명작입니다. 그래서 무디어진 인간의 지극히 평범한 하루를 리얼하게 그립니다.
스토리랄 것도 없다. 사건도 없고 수용소생활의 세밀한 묘사일 뿐이다. 스탈린이 소련을 공포정치로 몰아부쳤던 1942년. 슈호프는 독일과의 전쟁 당시 포로로 잠깐 붙잡혔다는 이유로 독일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게 된다.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수용되어 10년을 선고 받았지만 억울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 곳에 수용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슈호프처럼 자기도 모르는 죄로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가 빠르고 손재주가 좋은데다가 꾀 부릴지 모르는 슈호프는 벌써 8년 째 고된 노동과 혹독한 추위를 용케 견뎌내고 있었다.
8년이라는 비참한 일상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 가족의 생계에 대한 걱정까지 내려놓게 했다. 다만 그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한 가지는, 하루 세 끼 배급되는 빵과 수프를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다.
비참한 일상에서 슈호프를 버티게 한 것은 자유에 대한 갈망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따뜻한 동료애도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무사히 잘 지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2년의 형기만 남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슈호프에게 부러운 시선을 보내지만 정작 슈호프 자신만은 덤덤했다.
자네한테 내린 이십오 년의 형기를 자꾸 세려고 하지 마! 이십오 년을 살지 어떨지는 아무도 몰라. 확실한 건 내가 꼬박 팔 년을 살았다는 것 뿐이야! 발 밑만 보고 걸어다니란 말이지. 그러면, 어떻게 이곳엘 들어왔는지, 어떻게 이곳을 나갈 것인지 하는 생각을 할 시간이 없을 테니 말이야. P. 82
슈호프는 아주 흡족한 마음으로 잠이 든다. 오늘 하루는 그에게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 영창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점심 때는 죽 한 그릇을 속여 더 먹었다. 그리고 반장이 작업량 조절을 잘 해서 오후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벽돌쌓기도 했다. 줄칼 조각도 검사에 걸 리지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체자리 대신 순번을 맡아주고 많은 벌이를 했으며, 잎담배로 사지 않았는가. 그리고 찌뿌드드하던 몸도 이젠 씻은 듯이 다 나았다. 눈 앞이 캄캄한 그런 날이 아니었고, 거의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 P. 208
두 책이 말하는 참혹함을 견디는 방법은 정 반대쪽에 위치한다. 이반은 정신을 무디게 했고 빅터는 정신을 극대화하여 현실을 초월한다.
이반의 하루를 볼 때는 극단적 추위에 강제로 혹독하게 노출되는 것이 사람의 정신과 고귀함을 죽게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었다. 그러나 이번 책 죽음의 수용소는 더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사람은 적응하고 살 수 있음을 역설한다.
- 줄거리요약. 발췌
가. 1부 강제수용소에서의 체험
저자는 인간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다양한 욕구들이 삶의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말한다.
-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축장
감시병, 나치보다 카포들이 수감자들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카포들은 수감자중에서 이런 일에 적합한 자들로 뽑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즉시 쫒겨났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새 나치대원을 닮아갔다. -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가스실과 화장터가 있는 곳으로) 이송한다는 발표는 곧, 수감자 사이에는 무차별적 싸움의 도화선이 된다. 중요한 것은 명단에서 자신과 친구의 이름을 지우는 것이 된다. P 27
치열한 경쟁속에서 자기목숨을 구하기 위해 잔혹한 폭력과 도둑질은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도 팔아 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 29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을 해야한다. 매일, 매 시간마다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당신의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 P 121
인간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잇다.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의 선택권은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수감자 중에 극 소수의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디는 가치를 얻었다. p. 123
영화 [부활]을 보고 카페에서 결의했던 젊은 날의 결의를 우리는 잊었고 그래서 실패했다.
인간은 아무리 극한 상황일지라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책임과 의무를 지닌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에서도 인간은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일시적 삶을 비현실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하는 요인이 된다.
저자는 미래에 자신이 청중들 앞에서 ‘강제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힘겨운 상황을 견딘다. 자신을 연구대상으로 관찰한 것이다.
잘못된 미래의 희망적 믿음은 오류가 발견되는 날, 그 사람을 죽인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
이하 생략
https://www.happycampus.com/report-doc/23620596/